박미경의 책, <섬>을 읽고.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시, <섬>
공교롭게도 <섬>을 구입한 곳은 섬이었다. 가족 여행 차 지난 여름에 떠났던 제주도. 주인장들의 취향이 지배하던 한 독립 서점에는 그들의 추천 도서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중에서 간택한 것이 <섬>이다.
기록문학 성격을 가진 취재글과 멋진 흑백 사진들을 엮어 놓은 <섬>. 한국의 섬들을 이야기하되,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휴먼 다큐멘터리의 도서 판 같은 책이다. <섬>을 손에 쥔 독자는 이미지와 활자를 눈으로 보고 읽어가면서 짭짤한 독서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세상살이 신산해도, 갯호미 하나 달랑 들고 나가면 하루 네댓 시간씩 어김없이 제 몸을 열어 굴이며 누비조개며 온갖 갯것들을 무한정 쏟아내 준 덕택에, 돌아올 때면 삶의 중압감 대신에 묵직한 종태기가 들려오곤 했던 갯벌이었다. -본서 중에서
“식재료의 대부분이 굴업도에서 난 것이에요. 홍합 따고 고동 줍고 꽃게 잡고…… 봄가을에 재료의 대부분을 준비합니다. 겨울에는 청미래 뿌리나 칡 같은 약초 캐고…… 날 맑으면 맑은 대로, 안개 끼면 안개 낀 대로 할 일이 다 있어요. 물 때 맞으면 바다로 가고, 아니면 산에 가고 밭에 갑니다.” -본서 중에서
묘하게도 내게 <섬>은 그 자체로만 읽히지 않았다. 종종 은유로 읽히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나와 섬사람들 사이의 특정한 교집합과 더불어, 새로운 직업을 모색 중인 나의 형편 때문일 테다. 대학원 졸업 후, 어쩌면 나는 본격적으로 나만의 갯벌로 나아가 하루 네댓 시간씩 갯호미로 노동을 할지도 모르겠다. 갯벌에서 얻은 온갖 재료로 나의 손님들을 위한 밥상을 소박하게 차려 정성껏 환대하고 싶기에.
<섬>에는 정현종의 <섬>은 없었다. 이생진의 <만재도>가 있을 뿐이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섬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섬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섬>이 좋다.
만재도에 가고 싶었는데
마음 사람들이 오지 말라고 했다
아니 만재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가
아예 만재도는 없다고 했다가
만재도는 당신의 꿈속에 있을 뿐이라고 했다
만재도에 갔다온 사람도 쉬쉬했다
만재도를 숨기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도 만재도에 갔다왔으면서 만재도는 없다고 했다
-이생진의 시, <만재도>
#Oct. 5. 2024. 글 by 이.상.예.
'그 여자의 보물창고 > HIS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통의 문제 (0) | 2024.11.09 |
---|---|
몸과 이야기하다, 언어와 춤추다 (1) | 2024.10.19 |
기도를 훈련하라 (2) | 2024.09.21 |
이름 없는 순례자 (0) | 2024.09.14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1) | 2024.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