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구도자(求道者)라는 점에서 룰루 밀러와 나는 같은 종류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의 세상과는 달리, 밀러 씨의 세상에는 한 움큼의 신도 없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 다윈이 ‘종의 기원’으로 지퍼를 열 듯 열어젖힌 과학의 세상인 까닭이다. 오직 과학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밀러 씨의 세상이다.
밀러 씨의 아버지는 과학자답게 진화 교리에 따른 인간론을 어린 그에게 전수해주었다.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다, 고로 너는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인간론은 어린 자녀에게 자유라는 당의를 입은 혼란스러운 삶의 자세를 제공해주었다. ‘너 좋은 대로 살아라.’ 막연한 자유 안에서 어리둥절해하던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도덕률을 전수해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
그러나 어쩐 일인지, 진화론적 교리로 양육 받은 자녀들은 왕따와 우울증, 회피와 무시로 고통당하는가 하면, 반복되는 죽음의 충동으로 괴로워했다. 이에, 밀러 씨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괄호로 묶은 뒤, 자기 안의 생의 욕구를 에너지 삼아 스스로 과학적 진리를 탐구하고자 한다. 구도자 밀러 씨가 출발점이자, 후에는 디딤돌로 설정한 과학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다. 종교계의 거목들처럼 과학계의 유명한 지도자인 데이비드라면 환난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도 살아갈 의지와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알려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의 일생을 추적해 나가면서 밀러 씨는 ‘그릿, 자기기만’이라는 만만한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숙적 제거 음모, 과학적 광신’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진 뒤, ‘민들레 법칙과 범주 상실’이라는 구도적 깨달음과 통쾌한 복수에 까지 이른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결론으로 어류라는 범주의 허구성을 수용한 밀러 씨는 자신의 동성 파트너를 기어이 받아들이고 만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밀러 씨와 달리, 나는 신이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 세상의 인간론은 ‘너는 창조주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피조물로써 중요한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것도 적당히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중요해서,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창조주가 자기 아들을 희생시켰을 정도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론을 믿는 사람은 자기 좋은 대로가 아니라 신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신의 뜻을 따라 살기로 선택한 인간은 결국 '참 인간'으로 종(種)의 성(진)화를 성취하게 된다.
과학계의 밀러 씨는 데이비드의 스승인 박물학자 루이 아가시를 ‘선지자(prophet)’로 칭했다. 그러나 기독계의 내가 보기에 그는 ‘선지자’가 아니다. 정확히 분류하자면, 그는 ‘지혜자’, 그 중에서도 ‘잠언적 지혜자’라고 칭하는 것이 맞을 듯 싶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업무를 맞은 자라면, 잠언적 지혜자는 개미에게서조차 영적·도덕적 교훈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이자 선생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질서 정연한 도덕적 신의 세계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루이 아가시는 잠언적 지혜자와 결을 같이 한다.
성경의 지혜서에는 잠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신을 믿기는 했으나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 수용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경우는 전도서적 지혜자, 곧 코헬렛과 일단 시작을 같이 한다. 코헬렛은 역사, 문화, 정치, 종교, 자연, 천체와 같은 사회와 자연 과학 전반을 통섭한 자로서 세상의 엔트로피, 역설, 아이러니, 무자비한 폭력성을 등을 누구보다 깊게 연구한 해박한 지혜자다. 그는 결론적으로 인생이 허무하다고 외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동시에 허무함 중간 중간에 즐거움 단락을 삽입하여 사랑하는 자들과 먹고 마시고 즐길 것이 생의 낙임을 역설적으로 언급했다. 게다가 유한한 주제에 영원을 갈구하는 나약하고도 위대한 존재인 인간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경외하라는 꿀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밀러 씨의 연구에 따르면, 애석하게도 데이비드는 코헬렛과는 상당히 다른 결론을 맺는다. 즉, 그는 과학적 광신에 의한 우생학 지지자로 변신하여 사회에 악의 불도장을 남긴 빌런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따져보면, 데이비드를 추적하던 저자 룰루 밀러야말로 코헬렛에 가까운 과학계의 구도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한층 업그레이드 된 과학의 세상에서 살게 된 밀러 씨. 그는 새롭게 조정된 과학 세계 안에서 남편 대신에 아내를 얻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회적 성 변이를 선택한 셈이다.
신이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왕 구도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자기 세상을 넘어 완전히 다른 세상, 신이 있는 세상을 탐험해 보는 것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그러나, 밀러 씨의 책은 이러한 비천한 기독교인의 안타까움 따위에 콧방귀를 껴도 될 만큼 진솔하고, 논리 정연하고, 매력적인 자기 고백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책이었다.
#Aug. 31.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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