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칠층산

창고지기들 2024. 8. 24. 16:55

 

 

 

 

토머스 머튼의 책, <칠층산>을 읽고.

 

 

지난해 가을이었다. 단풍 구경을 할 요량으로 우리는 안성에 위치한 미리내 성지를 찾았다. 주께서 복음의 밀알로 조선 땅에 심으신 김대건 신부님이 안치된 곳이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성이던 시절 로마의 카타콤처럼 신도들이 은신했던 곳. 우리나라에도 이런 성지가 있었다니! 개신교 신자는 무식함이 꽃피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파란 하늘 아래 노란 은행잎과 새빨간 단풍잎이 핫도그 위의 머스터드 앤 케첩처럼 성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거룩한 단풍 구경을 마친 뒤, 성지 전용 서점에 들어갔다.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을 기념품으로 구입한 것은 그 때였다. 저자의 명성에 기대어 덥석 집으로 데리고 오기는 했으나, 사적으로 마주앉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850페이지가 넘는 육중함을 지니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때는 도착하고 마는 법.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불현듯 읽고자 하는 마음이 불어왔다. 무거운 <칠층산>을 독서대 위에 올려놓은 뒤, 나는 마치 테피스트리 직조공처럼 한 올 한 올, 아니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결국 854페이지까지 완주하는데 성공했다. 

 

<칠층산>은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에서 골라낸 제목으로 장르를 따지자면 신앙적 자서전이다. 연옥의 순례자가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게으름이라는 칠층 정죄산을 하나씩 밟고 천국에 가닿는 것처럼, 저자는 사제가 되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차근차근 고백하면서 죄는 참회하고, 은총은 찬양하고 있다. 한 개인의 지난한 사연을 오래 참으면서 들어주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나 공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 경우는 저자에 대한 막연한 흠모가 독서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토머스 머튼은 나와 같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조차 명성이 자자한 영성가인 것이다. 높은 수준의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사람의 처음이 어땠는지 궁금해 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그가 직접 쓴 자서전을 읽는 것으로 자연스레 충족되었다.

 

개인적으로 <칠층산>의 재미는 자기 삶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그물처럼 내 삶의 부분들을 건져 올릴 때에 발생하곤 했다. 이를 테면,

 

 

나는 죽음의 노예 처지에서 해방되기 며칠 전에야 겨우 나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느끼는 은총을 받았다. 이 은총의 빛은 그렇게 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드디어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한 존재인가를 진정으로 깨달았다. -본서 중에서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이제 비로소 나는 저자가 느꼈다던 그 나약함과 무력함을 완연히 느끼는 중이다. 이것이 은총의 결과임은 잘 알고 있다. 평생 그것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해서는 현실 인식에 실패하는 자들이 숱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한 존재인가!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내가 참으로 은총 받은 존재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옥의 거짓 겸손은 저지른 죄악에 대해 피할 수 없이 느껴야 하는 치욕과 수치심이다. … 혹독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교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영혼 안에서 온갖 교만과 자애심이 소진된 후에라야 우리는 비로소 이러한 질곡에서 구원되어 과거의 죄악 때문에 고통이나 괴로운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된다. 성인들은 자기 죄악이 회상될 경우, 그 죄악을 기억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한다. 따라서 과거에 범한 죄악까지 현재 기쁨의 원인으로 변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데 이바지한다. 지옥의 무서운 겸손과 함께 소멸되어야 할 것은 교만이다. 우리가 현세에 살고 있는 한, 지독한 번민마저 은총으로 변할 수 있고 따라서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본서 중에서

 

나의 과거는 지옥의 거짓 겸손에 의한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입술로는 고백해도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수용한 자는 자기 죄악이라는 그림자에 압도되어 치욕과 수치심으로 마냥 고통당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더욱 눈부신 은혜에 감격하기 마련이다. 그에게 슬픔, 번민, 수치, 괴로움 등은 몽땅 기쁨의 재료가 된다. 겸손의 은총을 받은 자에게는 삶의 모든 재료가 기쁨을 만들어내는 기쁨의 연금술이 선사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 생활을 단순히 은총이라는 초자연적 옷을 입힌 자연적 삶에 불과한 것처럼 착각하고 교회로 들어가는 무서운 과오를 범했다. 이전에 살던 대로 계속 살고, 이전에 하던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되 다만 대죄를 피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 그러나 지성의 개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의지라는 주인’이 완전히 하느님께 예속하지 않는 한, 지성의 개종은 어디까지 불안정하고 어설픈 것이었다. -본서 중에서

 

썬데이 크리스천은 확정된 상태가 아니라 지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성도의 성화 과정 중 비교적 초기에 있는 일군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래 어떤 분야든 초급 과정의 숫자가 제일 많은 법이다. 그러니 마냥 개탄할 것만은 아니다. 개탄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성도의 일거수일투족이 모조리 은혜임을 알고, 끈질기게 오직 은혜만을 구할 일이다. 그것만이 나로 소금의 맛을 잃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곧 덕행으로 삶을 디자인하여 영원한 평화를 추구하여 기어이 가닿고 말 것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하느님은 인간을,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이 되도록 부르신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대로 소금의 맛은 초자연적 생명이므로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 의존하기를 중지하고, 세속적 사물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나, 또는 이를 상실할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에 따라 살아간다면 소금의 맛을 잃게 된다. -본서 중에서

 

덕행(선을 행하는 항구한 습성)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덕행은 행복을 획득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덕행 없이는 기쁨이 있을 수 없다. 덕행은 인간의 자연적 정력을 조정하고 조절하여 조화와 완성과 평형을 지향케 하며 마침내 인간 본성이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원한 평화를 얻도록 하는 습성인 까닭이다. -본서 중에서

 

 

 

 

#Aug. 24.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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