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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화장 매일 아침눈먼 거울 앞에서아담적 본성에 괴로워하며얼굴에 화장을 합니다. 그동안 저를 숨겨주었던소비의 책들과 기표의 사람들그리고 키치의 상징들은이미 화장을 씻고당신 앞에 누워버렸으니까요. 화장을 한 모습에서 조차당신은 기어이 저를 찾아내시겠지요?그날이 오면우리는 정말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찾아주시길 간절히 바라며오늘 아침도 저는아담적 본성에 괴로워하며당신의 형상에 화장을 합니다. #Jul. 3. 2006. @ Grand Rapids. 시 by 이.상.예.그림 by 조르주 쇠라(Georges Serat), 화장하는 젊은 여인(Young Woman Powdering Herslf),1889-1890, 캔버스에 유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느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을 읽고. 소설 은 무지개떡이다. 여러 층위의 이야기들이 알록달록 쌓여있다. 화자 밀란쿠는 한가한 사람이다. 아내 베라와 함께 프랑스의 한 고성을 개조한 호텔에 머물면서 밤새도록 18세기 드농의 소설 속 인물들(T 부인과 젊은 기사 등)과 함께 20세기 인물들(베르크, 뱅상, 체호르집스키 등)을 관조하면서 즐기는 까닭이다. 내키는 대로 양쪽을 오가며 관찰하던 화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 실존 수학에서 이 체험은 두 기본 방정식 형태로 나타난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본서 중에서 개신교인인 내게 18세기와 20세기를 각각 느림의 시대와 빠름..

남은 자의 일

남은 자의 일 어느 날 새벽, 나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내가 발견된 곳은 깊고 낮은 골짜기였다. 음습한 늪에 처박혀 버둥거리고 있던 나를 꺼내오는 것은 불편하고도 불쾌한 일이었다. 아마도 잠자는 동안 무의식이 멋대로 현실 자각 타임을 실행한 까닭에 일어난 일인 듯싶었다. 요즘 부쩍 내 안의 교만한 자들이 입을 모아 나를 루저(Loser)라고 조롱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내가 봐도 현실의 나는 과연 루저가 맞다. 나이나 건강 혹은 직업이나 경제력 면에서 나는 잉여 인간이다. 쓸 데 없어 남아도는 부류 속에 내가 있다. 이는 내 선택의 결과로 보인다. 악착같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수 없이 잉여 되었다기보다는 부단한 소극적 선택에 의해서 나는 결국 잉여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

메릴린 로빈슨의 책, 를 읽고. 처음 메릴린 로빈슨을 알게 된 것은 의 저자 데이비드 깁슨 덕분이었다. 어느 때고 꼭 읽어보라는 믿음직스러운 그의 말을 따라 과 를 읽었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은 썩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맞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어서 탐구 차원에서 소설 과 와 함께 에세이 책인 를 구입해 놓았다. 는 심심풀이로 읽기에는 내용이나 분량(469p)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이 이 책을 한동안 데면데면하게 대했던 이유다. 하지만 결국 때는 차버렸고, 완독할 의도 없이 첫 장 ‘인문주의’를 읽은 것이 화근(?!)이 되어 별 수 없이 다 읽고 말았다. 요 사이 읽은 책들 중에서 단연 발군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그녀의 소설보다 그녀의 에세이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나는 서사보다 먼..

연약하나 위대한

연약하나 위대한 “저희는 아직 자가(自家) 주택이 없어요!” 은행 업무를 도와주던 그녀의 눈빛이 변한 것은 그 때였다. 변한 눈빛에 어려 있던 것은 그 나이 먹도록 뭐했느냐는 비난 보다는 대체 어쩌다가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우리는 성실하고 소박한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근자감일지도 모르겠지만!ㅋ)이다. 그 후로 그녀는 더욱 성심껏 우리를 도와주었다. 코로나를 계기로 귀국했을 무렵 고국에는 부동산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이 광풍인 까닭은 여느 바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거센 바람이라도 어느 정도 불고나면 그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데, 그것은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막강한 그 바람 앞에서 우리 같은 민초(‘민트 초콜릿’이 아니라 ‘民草’)들은 김..

내가 만든 신

팀 켈러의 책, 을 읽고. 뜨거운 열기가 수북수북 내리던 어느 날, 담양의 한 독립서점에서 만난 책이다. 저자 팀 켈러는 도시 목회자들의 추구미이자 워너비 목회자다. 오랫동안 변방의 선교사로 성경 묵상에 집중하면서 살아온 내게 그가 낯선 것은 자연스럽다. 코로나를 이유로 반강제적으로 귀국을 당한 후, 도심의 교회를 다니고 나서야 그를 접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책을 구입해서 읽을 정도로 매력적여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꾸준함에는 장사가 없지 않은가? 짝사랑에 가까운 도시 목회자의 거듭되는 고백(?!) 덕분에 나는 결국 그의 책 을 읽었고, 그것이 나쁘지 않았던 까닭에 까지 정가에 구매하여 읽게 되었다. 책의 기본 전제는 이렇다. 문화는 저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대표 우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야구장과 꽃다발

#1. 야구장 첫 경험에는 으레 긴장감과 설렘과 불안감이 뒤엉키기 마련이다.나이 오십이 훌쩍 넘어서 해본 야구 첫 직관에는그것에 귀찮음이 더해져 있었다.^^;;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들의 열심으로 별 수 없이 수원 야구 경기장을 방문한 나는엉겹결에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게 되었다.ㅋ~ 대규모 스포츠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정해진 수순을 따라서 다같이 응원을 하면서도각자의 취향에 따라 음식이나 음료, 그리고 경기를 자유롭게 즐겼다.나는 그들과 함께 앉고, 서고, 고함치고, 노래하면서한팀을 응원하는 느슨한 연대의 즐거움을 누렸다.그럼에도 우리가 응원하는 팀은 역전패를 당했다.하지만 언짢을망정 아예 실망하는 사람은 없었다.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로 미국에서 야구 관람을 했던 아들은한국 야구가 훨씬 더..

이별 없는 세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책, 를 읽고. #1. 안식할 수 없는 곳, 피난처가 될 수 없는 곳이 집 일리 없다. 그런 점에서 국가 폭력의 희생자에게는 집이 없다. 가해자의 땅에 그가 나고 자란 집이 있는 까닭이다. 일찍 집을 떠난 작가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기를! #2. 독서하는 동안, 갱년기가 사춘기와 엇비슷해 보이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당해야 하고, 별 수 없이 지나가야만 하는 것이니까. 사춘기 시절의 나는 죽음, 소멸, 파멸에 대해서 분노했었다. 이제 갱년기를 지나는 자에게 그것은 더 이상 분노의 대상이 아니다. 받아들임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체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소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선택이 남았을 뿐. 사춘기가 지나갔듯이 갱년기도 지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쩔쩔매는 까닭..

7월의 시편

▶7월의 시편◀ 시편 95편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모든 신들보다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신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바다도 그의 것이라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우리가 굽혀 경배하며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그때에 너희 조상들이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

나의 자기 충족적 순간

나의 자기 충족적 순간 스쳐지나가면서 그가 말했다. 인생에는 자기 충족적인 순간이 있다고. 그 순간은 마치 씨앗과 같아서 이후의 시간은 그 순간의 의미를 증폭시키고, 지속되는 현재는 그 순간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나?! 그의 말은 여름날의 소나기 같았다. 흙먼지 가득한 일상에 찾아온 소나기를 우산 없이 흠뻑 곱씹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게 그런 순간은 언제였던가? 불현 듯 십 사년 전 케냐 선교사 파송식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니, 그 때의 나는 우주 발사체를 탑재한 위성이었다. 교회는 나를 우주와 같은 케냐로 쏘아 올렸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와 소통하면서 그녀 주위를 맴도는 중이다. 우리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는 내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있고, 나는 그녀를 위한 미션을 수행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