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창고지기들 2024. 8. 10. 10:52

 

 

 

 

 

레슬리 제이머슨의 책,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를 읽고.

 

 

내게는 의례성을 가진 습관들이 있다. 그 중에 묵상 글짓기가 있는데, 그것은 묵상 이후에 따라오는 일종의 연속 동작이다. 묵상이 거를 수 없는 끼니라면, 묵상 글짓기는 가끔 누리는 만찬이다. 기억에 남을 법한 것은 물론 끼니보다는 만찬 쪽이다.

 

이십년 가까이 짓고 있음에도 ‘묵상 글’이라는 장르는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성경이라는 텍스트(The Text)에 나의 텍스트(living text)를 연결하여 서로 엮어낸 결과물이다. 이는 진리를 나의 삶에 들이는 동시에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묵상 글짓기는 나를 대상으로 하는 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공적 설교가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라면, 묵상 글은 하나님과 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묵상 글의 정의와 목적이 사뭇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글 자체의 장르적 모호함은 고집스럽다. 모호함이 제조하는 안정감과 확신의 결여는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어중간한 글을 짓게 만든다. 급격히 폭락하고 있는 골밀도에 발맞추어 제대로 구부러지기 시작한 중년의 성도를 불쌍하게 여기실 자 누구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라. 그분의 긍휼을 따라 중년의 성도가 레슬리 제이미슨의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를 문득 만났다. 만남을 통해 그녀는 묵상 글을 짓는 자는 일종의 기자(記者)임을 깨닫고 만다.  

    

 

 

무력함이라는 딜레마(말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탐구욕과 영영 충분히 말할 수 없다는 무능력 사이의)는 에이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이 딜레마가 그의 말을 질식시키는 동시에 박차를 가한다. … 에이지가 자신이 기자임을 기억해냈을 때,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침묵할 수 없던 때 쓴 글을 보라. 그가 아멘을 구하다 그 대신 이 언어들을 찾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이제 더 면밀히 보라. 당신은 그가 점점 초조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의 죄책감이 작은 산불의 시작처럼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본서 중에서

 

애니의 꾸준한 시선 앞에서 내 글은 초라했다. 어딘가로 가는 것과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사이의 윤리적인 간극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바람에 비난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게 존중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보는 것, 계속해서 보는 것, 필요한 것을 얻자마자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존중이란 피사체가 늙어가는 모습을, 점점 더 복잡해지는 모습을,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써준 내러티브를 전복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일이다. 아직 다 끝낸 게 아니야. 충분히 보지 못했어 라고 말할 만큼의 지구력과 겸손성을 갖추는 일이다. -본서 중에서

 

 

≒ 내 눈은 두 개의 텍스트를 꾸준히 오가느라 사팔뜨기가 될 지경이다.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요량으로 대학원에 입학한 뒤, 맨 앞줄(노안으로 맨 앞이 아니면 불편함으로)에 앉아서 노욕을 다해 공부하는 중이다. 동시에 자신의 리빙 텍스트를 응시하기 위해 바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한편, 중심에서 먼 변두리를 꾸준히 선택하는 중이기도 하다.

 

묵상인인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신비로 점철된 그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담아내고 싶은 어불성설적 욕망은 자기 손가락으로 하늘을 꾹꾹 찌르며 달을 가리키려 한다. 하지만 나 조차 자기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내게 그럴 만한 재능이 없다는 것이야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슬리 제이미슨의 글을 읽을 때, 부러움으로 배가 터질 뻔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분과 나를 사랑한다. 그것이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결국 나는 그분의 말씀과 나의 삶을 계속해서 응시하기로 한다. 존중하기로 한다. 무력함이라는 딜레마를 딛고 달을 가리킬 언어들을 찾아내고, 보도하고, 증언하기를 쉬지 않기로 한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아멘!

 

 

 

즉흥성은 우리를 너무 많은 맥락, 너무 많은 조사, 너무 많은 의도가 가진 무거움과 복잡함에서 해방함으로써 우리에게 진정성을 허락한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즉흥성이 허락하는 것은 무지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장소를 바라보는 것은 그 어떤 시각도 아니다. … 다음의 진술은 참이다. 스리랑카는 천국이다. 다음의 진술 역시 참이다. 모든 천국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지다. -본서 중에서

 

≒ 약해져만 가는 시력을 탓하고 싶은 날들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시력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지성의 나태를 일으키는 태만한 마음. 그것이 맥락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는 등한시 한 채, 자주 직관에 의지하게 만들고 있다. 가볍게 즐기기 위한 여행은 무지와 손잡을 때에만 가능한 법. 그러나 삶은 직관적 여행일 수 없다. 성경의 의미와 삶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읽고 연구해야만 한다. 그러니 너 태만한 지성이여, 홀대를 당할지어다. 고통스러운 훈련을 통해 근면한 지성으로 거듭날 지어다.

 

 

 

노스탤지어는 기억의 공간 배치를 바꾼다. 침대를 정리하고 서랍장 위에는 꽃병을 올려놓고 커튼을 열어 햇빛을 들인다. 그곳에 사는 건 고통스러웠어 라고 말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고통스러웠다니까. 그렇게 우기는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을 그리워하니까. 우리는 그때의 고통을 그리워한다. 그 모든 것을 그리워한다. -본서 중에서

 

≒ 끔찍했던 케냐가 이미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만큼 노스탤지어의 힘이 막강하다는 얘기인데, 무식하기만 한 나는 무시하기에만 바빠왔다. 그러나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처럼 기억의 대이동은 오랜 시간을 따라 근면히 진행되었고, 내 기억의 공간은 끝내 재배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고통스러웠다니까”라는 우격다짐은 멀리 페이드아웃(fade out)된 채, 벌거벗은 고통은 추억을 옷 입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승화의 길에 올랐다. 어르신들의 말씀대로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케냐를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얼마 전에 아들 하진군에게 말했다. “이제는 케냐를 방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가 물었다. “정말? 어쩌다가?” 그 곳을 끔찍하게 여겼던 바를 그는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부정과 같은 어미의 말에 놀랐던 것이다. “응, 정말이야.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어.” 내친김에 변명 같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시간을 먹고 사는 노스탤지어의 파워는 정말 막강하더라.”

   

 

 

이 이야기는 아이가 드디어 계모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이루어지는 역방향의 세례(아이가 부모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통해 두 사람 사이에 “한층 완벽해진 신뢰”가 강화되는 승리로 끝을 맺는다. -본서 중에서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도마는 그분을 향해 비로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이 장면을 레슬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역방향의 세례’다. 알다시피, 세례의 시작이 하나님의 부름으로부터임은 물론이다. (정방향의)세례는 주께서 우리를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는 콜링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역방향의 세례가 일어나야 한다. 세례 받은 쪽에서 세례를 베푼 쪽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는 그런 것이다. 관계의 주도권을 서로 주고받는 다이내믹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혹은 계모) 됨에 무슨 대단한 자격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것은 그저 서로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필요와 충분을 만족시킨다. 하나님 자격이나 하나님의 자녀 자격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고, 나 역시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받아들임’은 생각보다 대단한 능력인 것이다.

 

갈수록 받아들이는 능력이 퇴화하는 인류다. 자신의 자기 됨 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편집해서 진열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또한 태생적인 성을 부정하고 거부한 채, 자신이 원하는 사회적 성을 스스로 선택하고는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성으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진리의 외침은 고요하고도 끈질기다. 부정(否定)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을 받아들인 자들을 부정(구원하지 못)할 진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은혜와 진리에 대한 받아들이는 능력을 더하고 곱하여 주시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Aug. 10.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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