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이름 없는 순례자

창고지기들 2024. 9. 14. 22:09

 

 

 

 

 

무명의 순례자가 쓴, <이름 없는 순례자>를 읽고.

 

 

말씀과 기도는 나의 오른발과 왼발이다.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떼어 내딛으면서 나는 그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히 오른발잡이다. 기도보다는 말씀(성경)에 주력하기가 쉬운 것이다. 다행히도 내 신앙의 전통은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덕분에 나의 말씀 편애는 정당한 편이었다. 장자인 말씀을 위하느라 차남인 기도는 암암리에 괄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잘 걷기 위해서는 오른발과 왼발이 대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말씀에 집중할수록 내게 더욱 필요한 것은 기도인 것이다.  

 

무명씨로 말할 것 같으면, 서방 교회 개신교 신자인 나의 대척점에 서있던 사람이다. 그는 동방 교회의 신자로서 직업적 순례자이자, 그 무엇보다 기도에 주력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이름 없는 순례자>에서 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몸소 배우고 훈련하여 익힌 ‘예수기도’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스승님은 저에게 책을 건네신 다음, 말씀을 이어 나가셨습니다. “내심으로 하는 끊임없는 ‘예수 기도’란 예수님이 자신 앞에 계시다고 생각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잠들었을 때조차, 항상 생각과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끊임없이 줄곧 부르는 기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지요.” -본서 중에서

 

스승님은 <<자애록>>을 펴서 신학자 시메온 성인의 글을 골라 읽기 시작했습니다. “침묵과 고요 속에 앉아 있어라.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아라. 숨을 죽이고 생각으로 네 마음을 들여다보아라. 네 생각을 네 마음의 중심으로 모아라. 그러고는 나직하고 단순한 목소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라. 잡다한 생각들은 멀리 쫓아 버려라. 인내하고 내 말을 자주 실천하여라.” -본서 중에서

 

 

매우 겸손하여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던 무명씨에 따르면, 길잡이 없는 영혼의 일은 허사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선진들, 곧 교부들과 성인들과 스승들의 말(책)을 실천으로 옮겨나간다. 성경보다 그들의 책을 탐독했던 것은 그것이 동시대의 언어로 지어진 까닭에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만큼 불친절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가 일절 성경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와는 접근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서방 교회 개신교 신자들은 일차적으로 이해나 연구를 위해 성경에 접근한다. 반면, 동방교회 신자인 무명씨는 오로지 순종과 실천을 위해 성경에 접근했다. 성경 연구를 즐거워하는 서방교회 신자들은 이와 같은 무명씨의 태도를 반드시 배워 익혀야 한다.  

 

성경은 실천을 위해 접근하는 자들에게 좀처럼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연구를 위해 접근하는 자들에게 성경은 다소 너그러운 편이다. 그래서일까? 성경 곁을 맴 돌면서 교부들이나 성인들의 책을 주로 읽은 무명씨와는 달리, 내게 성경은 단 한 권의 책이다. 그가 쉬지 않고 기도를 하듯 나는 쉬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이다. 성경 이외의 다른 책들은 그저 지나가는 책일 뿐이다. 더구나 성경 이외의 그 누구도 스승으로 삼지 않는 나다. 그런데 이러한 솔라 스크립투라는 사실 양날의 검이다. 그것만을 고집하다가 교부들이나 성인들의 주옥같은 가르침을 간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교만하게도 전통의 유산을 무시하다가 스스로 비천하게 되어 가난에 허덕이게 되고만 것이다.

 

 

교만을 떨어뜨리고, 겸손을 누더기처럼 걸친 채, 나는 무명씨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기도’를 배웠다. 사도 바울의 명령을 따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인생이 되길 소망하면서, 동방 교회 신자로부터 지혜를 빌렸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거듭 기도할 때마다 달라지는 기도의 의미로 인하여 놀랐다. 게다가 기도에 있어서 집중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 나는 얼마나 무식한 자인가! 그래서 더욱 단순 무식하게 기도하기로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부르다가 내가 죽을 단 한 분뿐인 나의 님을 목 놓아 부르기로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Sep. 14.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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