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몸과 이야기하다, 언어와 춤추다

창고지기들 2024. 10. 19. 10:12

 

 

 

 

 

 

이시다 센의 책, <몸과 이야기하다, 언어와 춤추다>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며 화제를 전환하겠지. 그런데 나는 이야기를 중간에 끊고도 끊었다고 자각하지 못한다. 취하면 망설임 없이 더, 훅하고 끼어든다. 나중에야, 끙끙 앓는 날이 늘어났기 때문에, 한 이야기 또 하면 알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렇지만 다정한 사람은 분명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해보기로 했다. -본서 중에서

 

 

이쯤 되면, 디졸브의 귀재라고 해야겠다.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잡이로 써나가는 데도 매끄럽기 짝이 없다. 심리스(Seamless)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중첩의 속도가 빠르지만, 시끄럽다거나 어지럽다기 보다는 대체로 조용하고 한가롭다. 내용과 문장, 그 안팎의 속도 차이가 만들어내는 묘한 느낌도 좋다. 뜨거운 탕에 막 들어갔을 때 시원하다고 외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비슷한 또래, 비슷한 지역에서 나고 자란 여성의 문장을 만나는 것이 반가웠다. 그것은 동질감에 뿌리를 둔 감정이었을 테다. 동시에, 정시에 출퇴근을 일절 해 본적이 없는 나와는 달리 그것과 함께 은퇴까지 경험한 작가였기에 더 반가웠는 지도 모른다. 

 

 

몸에서 벗어나 우물 바닥에 잠들어 있던 말을 퍼 올린다. 한 줄이 한 장이 된다. 매일 퍼 올려도, 누구에게도 다 전해줄 수 없다. 그렇게 단념했을 때, 가장 읽어주기를 바란 것은 마음이라고 깨달았다. 쭈그리고 앉아 돌을 뒤집었을 때 수많은 벌레가 나타난 것 같은, 답과의 대면이었다. 이것은 아니야, 이것을 어떨까, 더 딱 맞는 게 있을 거야, 반드시. 모르는 수신인의 주소를 손에 쥔 채로, 아등바등 찾으러 다녔다. 마음과 몸은 하루만 쉬어도 서툴러진다. 계속하다 보면, 하나로 뭉쳐져 풀밭을 굴러다닐지도 모른다. 어떤 나무가 있는지, 날씨는 좋은지, 보고 싶으니 그만두지 않고 있다. 횡단보도에서 멈추었더니,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른손에 주먹밥을 들고 있었다. 가세요, 왼손으로, 반대편으로 건너라고 재촉했다. 고마워요. 살짝 뒤어서, 건너가 춤춘다. -본서 중에서

 

 

짧게 자른 손톱 같은 단문이 만들어내는 미니멀한 시적인 느낌을 좋아한다. 그러나 타고난 나의 호흡은 단문이 숨 가쁘다. 단문에게 인색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자꾸 설명하고 싶고, 자주 변호나 변증하고 싶으며, 종종 자기주장을 하거나, 그것을 인정받고 싶다. 욕망을 따라 말과 글이 야금야금 길어져 간다.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글도 바뀔 수 없나 보다. 가을 하늘처럼 높아져 가는 혈당. 먹은 것도 별로 없는 데, 한탄하는 억울한 심정에게 타이레놀이나 먹여야겠다. 환절기 불청객인 감기를 맞이하여 말이 아니라 몸부터 돌봐야하니. 키리에 엘레이손!

 

 

 

#Oct. 19.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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