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의 책, <고통의 문제>를 읽고.
생즉고(生卽苦), 곧 삶은 고통일 뿐이라는 명제는 불교의 모퉁이돌이다. 이는 세상을 두루 살피고, 꿰뚫어 통찰한 후에 내린 석가모니의 지혜이다. 그에 따르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 고통이라는 첫 단추를 채우지 않는다면, 인간은 마지막 단추인 해탈을 채울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열반을 입을 수 없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그리스도인. 그러나 희노애락을 느끼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그들의 환경 역시 고통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루이스 씨는 고통에 관해 한 술을 더 떠,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근면히 생산해 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실제로는 날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실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의로운 존재’라는 믿을 만한 보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에게 고통이 문제 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의 ‘문제’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본서 중에서
루이스 씨에 따르면, 고통이란 자유 의지를 가진 두 실체, 곧 선한 하나님과 악한 인간의 친밀한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갈 배경인 세상(자연)을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르도록 창조하셨다. 이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조건인 동시에, 일상적인 삶을 제한하는 한계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선사하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기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탈취하여 제 것으로 삼으려는 타락을 선택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질서가 틀어지고 무질서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고통은 세상의 기본 값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만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기를 그만 두시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본성상 지금 우리의 인격에 있는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그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주된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본서 중에서
타락으로 변질된 인간 종(種), 반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선하시다. 그리하여 그분은 부패한 인간을 치료하고 바로 잡아주지 않으실 수 없다. 선함이란 올바르게 하고, 치료하여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인 까닭이다.
세상은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선과 창조물에게서 올라오는 악에 의해 교란되는, 그러나 악 때문에 고통 받는 자연을 하나님이 떠맡으심으로써 그 교란으로 인한 갈등이 해결되는 일종의 춤입니다. -본서 중에서
하나님의 선함은 단순히 착하고 아름답고 진실함으로 점철 된 것이 아닌 인간의 모든 악함과 추함과 거짓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선함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하나님의 선함을 따라 선용되어 버린다. 고통이라는 메가폰을 통해 쾌락으로 귀먹은 세상,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을 불러 깨우신다. 그들을 구속하시기 전까지 성실히 구원 사역을 하실 하나님이시기에 구속이 완성되기 전까지 고통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겸손하신 하나님은 모든 가능성이 등을 돌려버린 인간,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을 찾은 고통 받은 인간을 모조리 받아 구원으로 들이실 것이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겸손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배가 이미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백기를 드는 것은 궁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더 이상 지닐 가치가 없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을 바치는 것은 궁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분이라면, 그런 조건에서는 우리를 받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정복하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언제나 그분보다는 다른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붙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본서 중에서
며칠 전, 어느 내담자(!)주도로 진로 상담자 역할이 내게 맡겨졌다. 나는 그녀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한 개고생(고통)을 예고하면서도, 그 길의 가치와 그 길 위에서 얻게 될 기쁨이 그 모든 고통을 압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의 상담(?)은 축복 기도와 함께 유쾌하게 마무리 되었다. 헤어질 때 그녀는 가정 내에서의 신학적 질서를 언급하면서, 자신은 남성과 여성의 위계질서를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부부는 위계질서가 아니라 연합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라고 말했다. 연합이란 서로 다른 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면서. 어리둥절 하는 그녀의 표정을 뒤로한 채,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연합이란 서로 구별되는 존재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 범신론은 틀린 신조라기보다는 시대에 형편없이 뒤처진 신조입니다.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만드셨고, 그 구별된 존재들이 그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으며, 단순히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도 자기 떡을 물 위에 던지셨습니다.
나이가 들어가자, 고통은 없애야할 원수가 아니라 함께 걸어갈 수밖에 없는 동반자임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당뇨병을 성가신 건강의 길라잡이로 삼고 함께 사이좋게 살아가는 중이며, 곧 전세금을 올려 주어야 하는 탐탁하지 않은 전셋집을 본향을 사모하도록 하는 좋은 환경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중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Nov. 9.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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