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환의 책, 「오래된 연장통」을 읽고.
「오래된 연장통」의 저자는 대한민국 최초
진화심리학 박사학위 취득자다.
진화심리학은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분야이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널리 유포해야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대중이 그것의 존재를 알고,
그것이 각광을 받아야 자신의 입지가 확고해질 것이니 말이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진화심리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강조한다.
진화심리학이 드라마 광고 마케팅에도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본서는 신상품인 진화심리학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기적으로 적금을 붓듯이 한 잡지에 투고했던 원고들을 모아 만든
이 책에는 저자의 소포모어(sophomore)적 자기 확신이 넘쳐난다.
맹랑한 소포모어 스피릿(spirit)은
창조론을 적으로 공공연히 지목하는가 하면
(성경을 과학의 텍스트로 삼는
창조과학을 사이비 과학이라고 여기는
저자의 생각에는 나 역시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책이지, 과학을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작 과도(果刀)를 가지고 소도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다.
즉, 진화심리학은 심리학 자체(!)이자,
모든 문화와 인간의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설명해줄 수 있는 열쇠라고 장담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창조론자이되,
일정한 범위 내에서 진화를 인정한다.
그리고 진화심리학은 분명히
인간의 특정 부분을 이해하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선택한 이유였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나와 같은 종류의 독자들은 필요 없다는 듯
깍듯하게 문전박대했다.
그의 책을 사기 위해서 거금을 드린 대가가 문전박대라니!
결국, 나는 좀 더 포용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2학년짜리의 책이어서 그런 거라고 애써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연장통’이라는 제목은 저자가 만들어낸 메타포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저자는 진화심리학이 물리학이나 화학과 다르지 않는
엄밀한 과학이라고 과격하게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문학적인 비유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실소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자가 소개해주고 있는 진화심리학자들의 연구 가설들은
내게는 종종 공상을 넘어 망상처럼 들리곤 했다.
(나만 그렇게 들렸던 걸까?)
암튼, 저자가 말하는 오래된 연장통이란 인간의 마음을 의미한다.
저자에게 인간의 마음은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환경적 적응을 위해 자연 선택이 만들어 놓은 심리적 기제다.
즉, 자기 종의 생존과 번성을 위해서
인간은 오랜 진화의 기간 동안
특별한 심리적인 도구를 만들어왔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살던 인간,
그러니까 수렵과 채집기의 인간을 걸핏하면 들먹인다.
진화론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되어왔는데,
인간이 가장 오래 경험한 시기가 수렵 채집기이며,
인간의 심리적 기제들은
대부분 그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유아기(0-5세)가
한 인간의 결정적 시기라고 주장하면서
이 시기의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유아교육학과 많이 닮아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수렵 채집기를 인류의 결정적 시기로 여기고,
현재 인간의 심리적, 문화적 현상이
모두 수렵 채집기의 산물(오래된 연장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유아교육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자의 견해는
전형적인 축소주의를 드러낸다.
설명은 단순하고 명쾌할 수 있지만,
한계 역시 숨길 수 없는 축소주의는
소포모어들의 영원한 완소 아이템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진화심리학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정될 리 없다.
모든 선택은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화의 산물인 심리적 기제에 의한 자동 반응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일 것이다.(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러한 견해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심리적 기제에 의한 자동 반응을 인정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투르니에처럼 인간은 자유의지로
자신의 심리적 기제를 거스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부인이 인간을
정말 인간답게 하는 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문전박대와 숱한 아쉬움 속에서도
이 책을 통해 얻은 유익이 하나쯤은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 와서 유독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많이 먹게 된 이유를 진화심리학의 앵글을 통해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것에 의하면 우리 가족이 미국이나 한국에서보다
이 곳 아프리카에서 매운 고춧가루와 고추장이라는 향신료를
격하게 선호하는 것은 모두 항균을 위해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칼칼한 김치찌개, 얼큰한 육개장,
매콤한 돼지 불고기, 얼얼한 고추장찌개 등을 먹는 것은
낯선 이방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독서를 파한 후, 본전 생각 때문에 한동안 속이 쓰렸다.
차라리 본서의 날개에 소개되어 있는
스티븐 핑거의 「빈 서판」을 사서 읽을 걸! 하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끝으로 오지랖을 한번 넓혀보자면,
대한민국 최초 진화심리학자가
겸손히 자기 학문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어쨌든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하기를 바라며 마친다.
#Nov. 14. 2014. 글 by 이.상.예.
'그 여자의 보물창고 > HIS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0) | 2015.01.31 |
---|---|
침묵의 세계 (0) | 2014.12.12 |
일과 창조의 영성 (0) | 2014.11.03 |
철학자와 늑대 (0) | 2014.10.16 |
기독교 예배와 세계관 (0) | 2014.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