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창고지기들 2015. 1. 31. 17:15

 

 

 

알렉산더 슈메만의 책,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For the Life of the World」를 읽고

 


사실, 서방교회 전통의 개신교 언어에 싫증이 난 것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심지어 지겨워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협소하고, 개인주의적이며,

규격화된 경건의 언어로 다가와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신물 나는 언어 속에서 내 존재는 비틀려진 채로

바짝 마른 걸레처럼 무참해져 갔다.

그런데 그것은 헌 양말을 새것으로 바꿔 신듯이

가볍게 갈아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록달록한 새 양말을 꺼내 신는 것은

가끔씩 누려보는 가벼운 호사들 중 하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목말라하는 것뿐이었다.

이 책이 손에 들어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오래도록 책을 붙들고 관계하면서,

그러니까 밑줄치고, 하이라이트로 색칠하고,

코멘트를 달아가면서 나는 목마름을 얼마간 해갈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내게는 은혜의 도구였던 셈이다.

 


알렉산더 슈메만은 「하나님 나라의 성찬」을 통해서

이미 만나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책도 좋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이 훨씬 더 좋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동방교회의 예전학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풍성했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답게 슈메만의 언어는 우주적이고,

교회적(공동체적)이며, 종말론적이었다.

그렇게 그의 언어 속에 젖어들면서

사사롭고, 사사기스럽고, 사적이고, 축소된 언어는

조금씩 환기되어 갔다.

 


예전신학자답게 슈메만은 예전학의 관점에서

기독교가 종교도, 세속주의도 아님을 설파하고 있다.

종교와 세속주의는 같은 토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원론이다.

성과 속, 초자연과 자연, 내세와 현세,

영과 물질을 갈라놓는 막힌 담을 토대로

종교는 성, 초자연, 내세, 영을 취하고,

세속주의는 다른 쪽을 취하여 각자의 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세속주의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호불가침 조약 속에서

각자의 나라를 구축한 그들에게 불청객이 나타났다.

그리스도가 오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뿐만 아니라,

이원론의 막힌 담 또한 허셨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도둑질한 세속주의에게서

그것을 찾아와 하나님께 다시 봉헌했고,

축소되고 찌그러져 있던 종교로부터 기독교를 온전히 해방하셨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살과 피를

세상의 음식으로 내어주셨다.

그 물질을 먹고 마심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하고 연합할 수 있도록 하셨다.

나아가 진정한 성만찬적 존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생명을 위한 먹을거리로 주신)을

먹고 마심(문자적, 혹은 은유적인 의미에서)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세상은 인간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고 연합하는 도구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제 본래적인 위치를 되찾게 되었다.

 


타락은 세상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삼았을 때 발생했다.

에덴의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끊어지게 하는 과일이었다.

그것을 먹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파괴하고

그것 자체와만 교통하는 일이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주어진 도구로서의 세상을

목적으로 삼아버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본연의 자신 또한 잃어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하나님과의 교통과 연합의 도구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성만찬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큰 유익을 꼽으라면

묵상의 토대로서의 신학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묵상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지반으로 삼고 있는 신학은

삼위일체 신학이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는 말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측면을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제, 지금껏 이미 가지고 있었으나

확증하지 못했던 묵상의 또 하나의 토대로서의 신학을

이 책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성만찬 신학이다.

나를 비롯한 내게 주신 모든 세상을

그 분과 교통하게 해주는 도구로 삼는 묵상은

곧 개인적인 예배이자 예전이자 성례다.

이제 나의 묵상은 좀 더 풍성해질 것이다.

뿌리 깊은 이원론을 뒤로하고,

세상을 통해 그 분과 교통하고 연합하는 도구로서의 묵상,

예배로서의 묵상, 반드시 변화를 가져오고야마는

성례로서의 묵상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책 전체가 사랑스러웠지만

사적으로 특별히 아프도록 사랑스럽게 느껴진 부분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음식 자체를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먹는 행위는 죽어가는 세상과의 교통일 뿐이며,

결국 죽음과의 교통이다.

음식 그 자체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것은 이미 죽어 버린 생명이며,

시체처럼 냉장고에 보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탐식의 문제는 음식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데 있다.

음식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탐식가에게 음식은

생명과의 연합이 아니라 죽음과의 연합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탐식이 부른 당뇨병은

일면 음식을 목적이 아닌 생명을 위한 도구로 삼으라는

그 분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찬미와 찬양의 움직임(성만찬 예배)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 모든 아름다움과 좌절,

모든 배고픔과 만족을 그것들의 궁극적 목적이신 분께 바침으로써

마침내 의미 있는 것들이 되게 한다.


때때로 코헬렛의 뜨거운 한숨이 휘몰아치듯 불어올 때가 있다.

폭풍 속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는 하찮아질 뿐이다.

먹구름 뒤에 해가 숨어 있듯이 코헬렛의 폭풍이 멈추면

그 분이 오롯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지식은 폭풍 한가운데를 지날 때는 맥을 못 추는 법이다.

결국 폭풍 속에서 해야 할 일은 단 한가지다.

예배.

나와 내 모든 세상을 그 분께 끌고 가

그것을 돌려드리는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뿐이다.

그 분이 정해주시는 가치와 의미를

다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녀는(성모 마리아) 우리 모두를 대표한다.

우리가 오직 사랑과 순종 가운데 받아들이고 응답할 때,

즉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본질적 여성됨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참된 남성과 여성이 되기 때문에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생물학적 남성’(male)과

‘생물학적 여성’(female)으로서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

남성은 자신을 피조물의 ‘소유자’로 주장하지 않고

순종과 사랑, 응답과 받아들임 가운데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자신의 본성을 따를 때,

비로소 진정한 남성-피조물의 왕,

하나님의 창조성과 주도권을 나타내는 사제-이 된다.


피조물의 궁극적인 성은 여성성이다.

피조물의 대표로서 마리아는 사랑과 순종 가운데서

하나님을 자기 안에 받아들였다.

그 분에게 자신의 유전자, 곧 혈과 육을 기꺼이 봉헌했다.

기꺼이 자신을 양도했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을

기꺼이 그 분께 돌려드림으로써 그 분을 송축하고,

그 분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다. 흐음.

 


어머니됨은 여성됨의 완성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됨은 순종과 응답으로서의 사랑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사랑은 생명을 주고, 생명의 원천이 된다.


지난 연말 개인적인 화두는 여성됨에 관한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것을 관계적 측면에서

대충 정리하고 마무리 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됨의 완성이 순종과 응답으로 자기 양도를 통해

생명을 주는 어머니됨이라니! 흐음.

 


교회가 이 사람(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온 것은

건강을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나,

의학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의학을 대체하려 함이 아니다.

교회가 이 사람에게 오는 것은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 빛,

생명 속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단순히 고통 중에 있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고통을 순교자의 고통으로,

증인의 고통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 나라로 가시기 전 친정아버지는

극심한 고통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겨워지곤 했는데,

병의 고통이 성례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게 된다.

큰 고통 중에서 아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분명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그 분과 교통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은 단순히 암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순교자이자 증인됨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후에 친정어머니와 고모네 가족들이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친정 아비의 고통으로 생명을 창조하신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아비의 고통을 가치 있게, 의미 있게 만드신

당신은 홀로 높임을 받으시옵소서!

 


기독교 선교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슈메만의 말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다.

케냐라는 세상 속에서 선교사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케냐를 도구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연합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전혀 생소한 이 도구를 통해 경험하는 그 분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고 낯설고 때론 서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피조물인 나는

그 분이 내게 주신 케냐를 받아

그것을 감사함으로 다시 그 분께 봉헌해야한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제사장으로서의 일이다.

매일의 작은 제사가 그 분께 기쁨이 되기를.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닮은 성인이 되어가기를.

 


책을 다 읽은 후,

예배신학자인 남편과 성만찬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꽃을 피우던 말미에 나는 서방교회의 한 성도로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성만찬 신학을 교회들에게 널리 가르쳐 알게 하라고 말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Jan. 30. 201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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