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피카르트의 책, 「인간과 말」을 읽고.
막스 피카르트는 제사장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어(언어의 선험성)를
다시 그 분께 바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제사장의 언어로 물씬하다.
제사장의 언어는 사이의 언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어,
거룩함과 속됨 사이의 언어,
전체와 파편 사이의 언어.
그래서 그의 언어는 반가운 듯 낯설고,
즐거운 듯 우수에 차 있고, 맑은 듯 아스라하다.
그렇게 제사장은
선험성을 잃어버린 채 헐벗은 말들을 모아서
언어를 지어주신 분께로 가져가 봉헌한다.
언어는 처음부터 완성품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언어를 주신 이유는
세상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의 피조물들은 인간의 말,
곧 이름 붙여주기를 통해서 비로소 현존하게 되었고,
나아가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죄 이후 그것은 지속적으로 선험성을 상실해갔고,
결과적으로 잡음어가 세상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언어의 주인에서 잡음어의 하수인이 되었다.
그리고 언어는 사물을 다스릴 힘을 잃은 채
라푼젤을 찾아 방랑하는 눈 먼 왕자가 되었다.
하지만 시인은 이 이상의 일을 한다.
창조자가 창조한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알리는 것을 넘어서,
자신 주변의 사물을 말로 포착해내고,
시인 자신의 말로 묘사하여
다시 창조자에게 되돌려 보내는 일을 한다.
시인은 다행히도 시력을 잃지 않은 왕자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의 선험성에서
시어가 당도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은 일면 시인이기도 하다.
제사장도 하나님의 얼굴빛이 백성을 향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 때문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문장들이 시 못지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진리는 진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본질적으로 과잉과 결부되어 있다.
진리는 과잉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과잉의 언어(단순한 기호 이상의 언어)는
진리가 명제나 진술이 아닌 인격일 수밖에 없음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성경은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말씀 자체요, 진리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오병이어 기적의 남은 열 두 광주리는
딱 맞게 계산하지 못해 생긴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라,
충만하여 흘러넘칠 수밖에 없었던 진리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공동체는 진리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진리에.
그래야만 사랑이 공동체를 구축하느라
스스로 소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공동체가 이미 단단한 진리 위에 서 있다면,
거기서 사랑은 과잉이다.
사랑은 과잉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머물 수가 있다.
온전하게, 오직 그것, 단지 사랑이라는 자신으로.
-과잉은 존재를 오롯하게 한다.
사랑을 사랑답게 하는 사랑의 과잉은 진리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당연하게도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계시하신
진리이신 그리스도 위에서만이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복음의 언어가
자신의 본성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세속 언어의 엔진과 경쟁하며 더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완전히 다른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완전히 다른 언어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완전하게 다른 존재로 마법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복음을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게 하면
곧 세속의 언어가 복음을 집어 삼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완전히 다른 언어로
복음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완전히 다른 언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침묵일 것이다.
빙산의 일각인 말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빙산의 몸, 침묵.
‘침묵해요, 내가 당신을 들을 수 있도록!’
학생은 자신의 감정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물조차도
인정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정과 감정의 직접성은 사물을 판단하는 척도가 아니며,
감정은 헤겔의 말에 따르면,
넘어서서 앞으로 진행해야 하는 시작점일 뿐입니다.
감정은 감정이 갖추지 못한 객관성을 본받아야 하며,
그 반대로 오직 감정으로 느껴질 때만 인정받는
무언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기본구조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언어, 믿음, 인식, 악, 죽음, 사랑 등)의 선험성을
이야기하는 저자는 경험주의를 경계한다.
경험론을 토대로 한 교육받아온 나로선
감정과 이성 너머의 선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말로는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나,
그 믿음이라는 게 어찌나 변변치 못한지
감정의 주먹 한 방이면 번번이 곤죽이 되곤 한다.
그래서 감정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물(성경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재료들)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완고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회초리가 필요할까? 하.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되는
요한 복음서를 묵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서 묵상도 이제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바란다.
본문을 대할 때, 여운보다는 예감으로 더 많이 떨기를,
말씀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신이 두려워
혹시라도 과도하게 말하지 않기를.
#Feb. 14. 201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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