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일과 창조의 영성

창고지기들 2014. 11. 3. 16:57

 

 

 

 

 

 

 

파커 J. 팔머의 책, 「일과 창조의 영성」을 읽고

The Active Life: A spirituality of work, creativity, and caring

 


#1.


「일과 창조의 영성」은 개인적으로 읽은

파커 J. 팔머의 두 번째 책이다.

일전에 읽었던 그의 책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도 상당히 좋았었는데,

이번 것은 격하게(!) 좋아서 마치 롤러코스터나 탄 듯

읽는 내내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 못해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이런 재미와 통찰로 꽉 찬 만두 같은 책이라니!

 


스릴 넘치는 롤러코스터처럼 이 책도 커다란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자칭 개혁주의라고 하는 칼잡이 근본주의자들이 보면

물고 뜯을 만한 부분이 어지간함을 가뿐히 넘어서는 것이다.

장자와 유대교 하시디즘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일반은총적(!)인 스토리와 시(詩)에 대한 묵상,

게다가 통념적 신학 비틀기와 자유주의적인 성경해석은 분명 과격하다.

그러나 진리, 그것도 명제적이지 않고 인격적인 진리가

파격적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니 지레 놀라서 포기할 일이 아니다.

레너드 스윗의 말이라도 떠올리면서 롤러코스터에 오르는 편이 낫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을 믿기 원하실 수 있다.

모순의 어느 한쪽이든 부정하면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의 진리를 깨닫거든 그 정반대 진리를 찾으라.

이단이란 정반대의 잃은 진리다.

레너드 스윗, 「관계의 영성」 중에서

 


#2.


오늘날 유행하는 영성 이미지는 관조(contemplation) 일색이다.

관조의 멤버들에는 내면, 침묵, 고독, 향심성, 평온, 균형 등이 있는데,

이런 구성으로만 이루어진 영성은 온전할 리 없다.

왜냐하면 영성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에는

외면, 소리, 상호작용, 참여, 활기, 몸부림과 같은

행동(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오른발과 왼발이 완전한 한 쌍인 것처럼

관조와 행동은 어느 한 쪽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일체다.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오른발잡이와 왼발잡이가 있는 것처럼,

관조와 행동 역시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행동에 주력하는 쪽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행동 중심의 영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관조 일색의 영성이 유행하는 시대에

이 책이 더욱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The Active Life: A spirituality of work,

creativity, and caring」이다.

이는 관조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행동의 영성을 정립하는 책임을 드러내준다.

저자에게 있어서 관조란 실상으로 변장한 환상의 베일을 벗기고,

가면 뒤에 있는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관조는 환멸, 전위, 자발적 고독의 순간에 일어난다.

행동 혹은 활동이란 우리가 다른 존재와

성령과 더불어 현실을 공동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의 영역에는 일과 창조와 보살핌이 삼위일체를 이룬다.

 


행동의 위험성은 그것이이 외부의 요구와 강요에 의한

반응(reaction)에 의해서만 일어날 때 발생한다.

반응으로만 행동하는 자는 대상의 세계에 갇힌 죄수다.

대상의 세계에 갇힌 자는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전문가를 자처하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창조한다.

예를 들어, 정신과 전문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비정상의 범위를 넓혀서 더 많은 정신병자들을 창조해 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올바른 행동, 곧 반응으로써의 행동이 아니라

자유로운 내면의 결정과 선택에 의한 행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관조가 필요하다.

행동의 동기가 반응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확실한 내적 동기에 의한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관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활동에 필요한 재능을 발견하고,

각고의 연마로 기술을 닦는 일에도 관조가 따라 붙어야 하며,

행동이 다루는 대상(학생, 자녀, 성도, 글 등)을 깊이 알고,

존중하면서 함께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서도 관조는 필수다.

나아가 결과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결과보다는 헌신에 가치를 두기 위해서도 관조는 불가결하다.

마지막으로 행동에는 반드시 실패와 고통이 뒤따르는데,

관조가 동행하는 한 그것은 오히려 올바른 행동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행동의 영성 개론을 이야기한 후,

저자는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과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동하는 영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광야의 유혹은 유능한 존재로 행동하라는 유혹이었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결핍의 세계(경쟁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감사와 의존이 어떻게 풍요의 세계(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한 나눔과 섬김의 세계)를

임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부활의 위협’이라는 다소 전위적인 시구를 사용하여

공동체 안에서만 고립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한 없이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3.


행동하는 영성을 다루고 있는 책답게,

본서는 나의 리빙 텍스트(Living Text)인 선교 활동(행위)과 관련해서

수많은 통찰을 제공해주었다.

다음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좋았던 부분들이다.

 

 


도구적 행위는 성공과 실패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그 논리는 배움보다 성공을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로부터 배우든지 말든지 실패를 싫어하기 때문에

위험 감수를 만류하는 것이다 ……

표현적 행위는 내 밖에 있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신념과 깨달음과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취하는 것이다.

표현적인 행위는, 만일 내가 취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통찰과 재능과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취하는 것이다.

이처럼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표현적인 행위를 취함으로써

나는 사물의 체계에 나 나름대로 기여하게 되기 쉽다.


=선교는 도구적 행위가 아니라 표현적 행위다!

그러므로 실적과 효율성과 성공의 잣대로 선교를 재단하는

모든 사악한 의도들은 반드시 쇄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교 자체를 깊이 관조하면서

표현적 행위로서의 선교를 의식적으로 언어화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환멸을 느끼고 있다”

(being dis-illusioned)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삶에 대한, 타인에 대한,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환상을 벗겨내고 있다는 뜻이다.

길 위의 장애물과 같은 우리의 환상이 제거되면서

우리는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을 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선교지에 정박한지 3년이 다 되어 간다.

나는 이 기간에 ‘환멸의 시간들’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

그 동안 참 꾸준히도 믿음, 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선교 등에 대한 환상이 깨어져왔다.

덕분에 나는 매일 고단했고, 또한 고통스러웠다.

이 와중에 깨달은 사실은 눈을 들어 멀리 보면

무시무시한 환상들이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주저앉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환상을 깨뜨리면서 기어이 그 길을 걸어가신 분이 있고,

그 분의 발자국이 내 앞에 있다.

그래서 일단은 바로 앞의 발자국만 보기로 한다.

어떤 거대한 환멸이 기다리고 있든지

지금은 그것만 보고 따라가기로 한다.

 

 


우리가 천사 같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은

우리를 타인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 부분들은 구별 짓는 것이지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차별성 있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만심을 안겨준다.

달리 말하면, 우리를 인류의 공동 운명과

하나가 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성공과 자랑거리는 공동체의 재료가 아니고

우리의 죄와 실패가 그런 재료이다.

이런 어려운 영역들에서 우리는 인간의 조건을 대면하고

인생의 한계를 공유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법을 배운다.

감춰진 온전성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아는 것은

우리 속의 천사들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이다.


=선교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야 할 것은 내 안의 타락한 천사들이다.

나의 약함과 죄악을 나누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썩어지는 방법으로 그 만한 것은 없다.

죽어야 사는 비밀을 알고 싶다면 타락한 천사들을 붙들고

감춰진 온전성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행위자의 필요 때문에 수행되는 선은 선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런 선행은 그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

행위자의 이기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강요되기 일쑤다.

이런 사람들이 겪는 것은 자선의 경험이 아니라 폭력의 경험일 뿐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결정할 때마다 행해지는 폭력이다.


=때때로 선교 행위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선교가 그들의 필요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행할 때 그렇게 된다.

누구를 위한 선교인가?

이 흔한 질문 앞에서 정직하게 깊이 관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위대한 일,

우리가 영혼을 잃을까 봐 피하는 위대한 일은 바로

우리가 ‘실적’을 쌓을 수 없는 일을 뜻한다.

다름 아니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부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이다.

이런 일에는 ‘실적’이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열심히 하겠다는 헌신만 있을 뿐이다.

만일 이런 일을 측정 가능한 결과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그 결과는 오직 패배와 절망뿐일 것이다.


=실적은 없고 패배와 절망뿐인 선교에 헌신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는 미쳤다!

그리고 미친 우리의 헌신에 기도와 지원으로 동참하는 그대들도 미쳤다!

 

 


사실 고통은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동정심으로 공유되고,

공동체 안에서 공유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나서서 고통을 없애려고 할 때마다

오히려 그런 공유 작업을 약화시킬 따름이다.


=고통에 대한 올바른 행위는 해결이 아니라 공유다.

나는 고통 받는 그들이 먹는 빵과 계란과 설탕을 먹고,

고통 받는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 함께 있기 위해서 이 곳에 왔다.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공유하기 위해서

이 곳에 온 것이다. 이것이 나의 선교다.

 

 


즉, 자신의 진실에 계속 뿌리를 박음으로써

타인의 환상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이다.


=타인은 내게 강제로 요구하길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선교사에 대한 환상,

목사 사모에 대한 환상을 내게 강요하길 쉬지 않는다.

그것에 사로잡혔던 적도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은 손톱만큼도 없는 지옥을 살아야 했다.

타인의 환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괴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분의 음성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나의 진실에 뿌리를 박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부활을 믿는다면,

그냥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뼛속 깊이 확신하고 있다면,

우리는 정의를 위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모든 소유를 잃어버릴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활에 대한 뼛속 깊은 지식은 우리가 현재 조심스러운

자기 방위적인 삶을 정당화하려고 이용하는 두려움을 쫓아낼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두려움이 생명을 주는 신앙으로 대체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만 아시는)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도록 부름 받을 것이다.


=부활로 인하여 무용지물이 된 향품을 안고

빈 무덤을 나온 여인들 속에는 우리도 있었다.

그렇게 빈 무덤을 뒤로 하고 부활의 세계인 케냐에 온 후로

무참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무덤을 몹시 선호한다는 것이다.

부활의 세계는 환난과 위험으로 가득했고,

그래서 우리는 매일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숱하게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와 돌아보니 우리가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시위를 했던 것이다.

부활은 있다,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부활은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뒤로 하고

내가 이곳 케냐에서 계속 살아가는 이유이다.

주의 날에 내 아비가 부활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줄리아 에스퀴벨이 말하듯이,

“우리가 죽음 너머 있는 목표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용기를 품을 때

우리의 짐을 덜어주는 타인들이 언제나 있다”라는 것을 아는 일은

얼마나 큰 기쁨이겠는가!


=드림 공동체와 풀러 큐티 사모님들,

그리고 교회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가 부활의 위협으로 가득한 이 곳 케냐에 올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로부터 죽음 너머 있는 목표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용기와 자원을 공급받고 있다.

결코 홀로 갈 수 없는 길 위에서 나는 잠시 그들을 그리워한다.

 

 

 


#Nov. 3. 201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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