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철학자와 늑대

창고지기들 2014. 10. 16. 17:01

 

 

 

 

 

마크 롤랜즈의 책, 「철학자와 늑대」를 읽고.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도서 3:19)

 


「철학자와 늑대」는 영장류(인간)를 관조하는 철학에세이다.

저자 마크 롤랜즈가 영장류의 그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늑대라는 거울을 통해서다.

이러한 방법은 결론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결론은 늑대로부터 진화한 영장류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는 영장류의 희망 없음을 얘기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진화의 역사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라고 한다.

저자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돈도 많이 벌면서.

 


마크는 진화론자다.

그래서 그는 11년 동안 동거했던 늑대 브레닌을

동생이자 형으로 소개한다.

그는 진화의 최종판인 영장류는 특유의 약함 때문에

속임수와 계략 짜기와 같은 악함을 계발시켜

늑대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말한다.

동시에 늑대 브레닌의 우월함을 설파하면서

일전의 존 그레이가 말했던 것처럼

진화가 진보가 아님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나는 창조론자다.

그래서 나 역시 저자와 마찬가지로

동물(자연)을 형제라고 생각한다.

창조주에 의해 탄생한 다 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도서의 코헬렛은 짐승이나 인간이나

죽음 앞에서 다 같은 처지라고 말한다.

심지어 개미에게서 조차 배우라는 잠언의 기자의 말을 떠올려보면

늑대를 통해서 인간의 그러함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방법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색다른 점을 찾는다면,

저자의 언어는 재기발랄 하여 읽을 때

자주 피식 웃게 된다는 점이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종들 간의

사랑(필리아)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점은 전혀 다른 종,

곧 신이신 그 분과 인간인 나의 관계에

일정한 유비를 제공해줌으로써 독서 과정을 재밌게 만들어 주었다.

신을 믿지 않는 저자가 본인의 책을

이와 같이 즐겼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디 뒷목이나 잡지를 않기 바라면서,

그 흥미로운 내용들을 스케치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개나 늑대가 해야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면 본능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이 커져 더 침착해진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통제해 줄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그리고 브레닌에게는 내가 그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규율과 자유 사이에 관계는 심오하고 중요하다.

규율은 가장 소중한 자유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

규율 없이는 잠시 허가된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

하나님은 먼저 율법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들을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노예였다.

막강한 권력의 그늘 아래서 지배받고 통제받으며 300년을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을 지배하던 권력이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그들은 그토록 원하던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에게는 자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의 통제 아래서 그들은 비로소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율법 안에서 그들은 비로소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계약이 성립하려면 당사자들의 힘이

어느 정도는 동등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계약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에 수긍할 것이다.

따라서 도움을 주거나 해칠 능력도 없는,

당신보다 훨씬 약한 상대는 계약의 범위에

포함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계약을 체결하셨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한 당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계약이라는 것은 그것을 맺는 양편이

어느 정도 동등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누가 봐도 확실히 한쪽으로 기우는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계약을 제안하셨다.

게다가 절대 약자였던 이스라엘의 계약 파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신실하게 계약을 지키셨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을

막대하게 다운 사이즈(Down Size) 시키셨던 것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 때 일어난

성자 하나님의 인카네이션과 다르지 않다.

즉,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계약은

구약의 인카네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하나님께서는 왜 유한해지는

다운 사이즈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이 늑대는 진정한 관계는 결코 계약에 의해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먼저 신의가 있다.

이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한다.

계산과 계약은 항상 그 다음이다.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신의와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스라엘이 계약을 깨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의와 사랑으로 그 관계를 붙드셨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가끔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이도 있다.

그럴 경우 가장 중요한 실존적 과제는

우리의 삶에서 그들의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만들어준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방법이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만드셨다.

물리적으로 그 분은 지금 여기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분이 오시기 전까지 내가 할 일은

성만찬의 그 밤에 당부하셨던 말씀,

곧 그 분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분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기 마련이다.

실존적 상황이 제 아무리 암울하고, 고통스럽다 해도

그리스도 닮기를 포기하지 않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한다.

이것이 그 분을 기억하는 방법이요,

그 분을 경외하는 방법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 ……

때로는 삶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이 가장 가치 있기도 하다.

가장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최근 들어 부대끼고 불편하기 그지없던 이곳 케냐가

일면 가장 가치 있는 곳이라는 관점에 살짝 수긍하게 되었다.

지금껏 한국과 미국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한계를 벗어나는 경험,

전혀 새로운 삶의 이면을 대면하는 일은

케냐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이나,

동시에 가치가 살며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이다.

흐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최상의 상태(최악의 순간)에 내가 어떤 존재였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상태에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최상의 순간들이라는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드러난다. ……

우리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두려운 순간들은

좋은 것이든 악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우리의 것이 된다.

나의 순간은 무리의 순간이며

나는 무리를 통해서만 나 자신을 기억할 수 있다.

 

지나간 내 모습을 회상한다.

내 지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 바로 나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의 가족들과 지체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순간은 곧 나의 순간이고,

나는 그들을 통해서 내 자신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기억된다.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고, 깨어지고,

무너지는 순간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욱 오롯해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시위하고,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이 다음에도.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전도서 8:15)

 


전도서의 코헬렛은 순간을 즐기라고 권면한다.

아직 숨이 붙어 인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자신의 현재를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를 누리는 일은 저자의 말처럼

시간성이 아니라 순간성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시간성은 무엇이고 순간성은 무엇인가?


시간성이란 시간을 과거에서 미래로 뻗어 나가는

하나의 일직선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성 안에 있는 피조물(인간)에게

현재 혹은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된 과거나 욕망하는 미래를 현재라고 믿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며,

순간을 통과해서 시간을 관조하기 때문이다.

반면 순간성은 순간 자체를 응시하고 향유할 수 있다.

그래서 순간성 안에 살아가는 피조물(늑대)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절대 지루해 하는 법이 없다.

반복을 지루해하는 것은 시간성 안에 있는 피조물들의 몫이다.

순간성 안에 있는 피조물들은 반복되는 일상의 일들이

매번 새롭고, 재밌고, 싱그럽다.


흥미로운 것은 코헬렛이나 저자가 모두

시간성 안에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성을 강조하면서

주어진 현재를 즐거워하라고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얘기해 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성 안에 살도록 저주 받은 피조물이

순간성을 완전히 파악하고,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코헬렛은 현재를 즐길 줄 아는 것을

‘능력(ability)'라고 언급했다.(전도서 5:19, 6:2)

이 능력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단한 연습과 훈련이 동반된다면

어느 정도 구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의식적인 훈련 모드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중고로 구입한 것들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읽는 내내 내 책 같지 않아서

줄을 그을 때마다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저자가 늑대 브레닌이 죽었을 때,

신을 저주했다는 사실이 가시지 않고 남아있다.

저자가 말하는 형편없는 영장류란 태생 자체가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늑대 브레닌을 잃고 슬픔 속에서 살아가던 저자에게

아들 브레닌을 주신 자비하신 창조주를 기억하며 마친다.

 


#Oct. 15. 201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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