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성서학자가 신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

창고지기들 2024. 3. 9. 12:07

 

 

 

 

 

스캇 맥나이트의 책, <성서학자가 신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를 읽고.

 

 

신학은 성서학자와 (교의)신학자의 공통분모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데, 이를 위해서 그들은 공히 성경을 연구한다. 즉,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확장, 심화하는 작업이 신학인 것이다. 물론, 그들이 성경을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성경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성서학자들은 나무 하나, 돌 하나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그 곳에 존재하게 된 상황과 이유, 그리고 그것이 숲 전체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 지에 대해서 세밀하게 연구한다. 반면, 신학자들은 숲의 구획을 정하고, 개별 나무들을 근거로 숲의 영역들을 추상화하여, 그것이 갖는 일반적인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거시적으로 연구한다. 

 

각자 서로 다양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도 합의된 전제는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성경의 정점이라는 것과 성경은 다른 누구도 아닌 교회의 책이라는 것이다. 즉, 성서학자와 신학자는 성경 연구를 통한 신학으로 교회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다.

 

<성서학자가 신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는 일전에 읽었던 한스 부어스마의 <신학자가 성서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와 처음부터 한 쌍으로 기획된 책이다. 성서학자인 스캇 맥나이트가 한스 부어스마와 같은 신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신학은 끊임없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학은 성경 주해에 자신의 중앙 통제소를 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충실한 해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러나 충실한 해석은 교회의 신학적 지혜를 따라 형성되고, 신학적 무정부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본서 중에서

 

성경은 해석의 대상이지, 이용(주장을 뒷받침하는데 근거로써)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성경은 교회를 위한 것이지, 성경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학자나 성서학자는 성경주의(biblicism), 누다 스크립투라(nuda Sciptura), 솔로 스크립투라(solo Sciptura)를 철저히 경계하고, 대신에 프리마 스크립투라(prima Scriptura),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를 견지해야 한다. 이때 성경주의란 의도적으로 교회의 신학과 성경 본문의 바탕이 되는 고대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오직 문자적 해석에 목을 맴으로써 신학의 진공상태, 곧 신학적 무정부주의를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2. 신학이 성서학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삼위일체적 사고는 화자 중심 주해에서 전제된다.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세 분의 존재가 있어야만 하는 듯 보이는 본문으로 되돌아가 세 분을 분명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해석함으로써 삼위일체적 사고는 확장된다. -본서 중에서

 

저자는 신학자들의 삼위일체 교리가 성서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예로 든다. 처음 신약학자들은 수직축 측면에서 기독론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를 접근했다. 그러나 점차 그들은 화자 중심 주해(prosopological exegesis) 방식을 따라 신약 성경의 기독론을 수직축 측면이 아니라 관계망 측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학자들의 신경이 성서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성경 주해 방식을 계발 발전시키도록 도왔던 것이다.

 

 

3. 신학은 역사에 기반한 성서학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구원, 은혜, 믿음을 다루는 조직신학에, 좋은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는 은혜에 관한 바클레이의 최신 연구다. 곧 은혜와 의무 또는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보답은 사호 배타적이지 않다. … 그리고 이 은혜는 조직신학을 새롭게 창조할 만한 새로운 생명력으로 여겨질 가치가 있다. -본서 중에서

 

저자는 최근에 발표된 성서학자 바클레이의 ‘은혜’에 대한 연구를 소개함으로써, 신학자들이 가르쳐온 전통적인 은혜의 개념,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인 은혜 신학을 개혁해야 할 때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오래된 주석적 결론들에 대한 융통성 없는 고집을 버리고, 성서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신학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4. 신학은 더 많은 서사를 필요로 한다.

 

조직신학의 범주들은 논리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를 갖지만, 시간적 차원은 결여되어 있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어떤 물질, 곧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다.” … 그러나 우리의 체계가 그 체계에 맞지 않은 재료를 제외해 버린다면,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다. -본서 중에서

 

저자는 논리적, 수직적 질서 체계로 연구되고 있는 기존의 신학을 시간적, 서사적 차원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신정 시대, 왕정 시대, 그리스도 통치 시대로 나누어 서사에 따른 신학을 재구성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할 때의 유익은 기존의 신학이 제외시켰던 성경의 부분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는 것과 이전보다 훨씬 더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사적인 틀은 언제나 교회를 강조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5. 신학은 살아낸 신학이 되어야 한다.

 

윤리학이나 살아낸 신학과 분리된 신학은 성경적 신학이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윤리학이 신학에 통합되었듯이,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도 윤리학에 통합되었다. … 신학은 살아낸 신학이고, 살아낸 신학은 지역적이다. 그러므로 지역적 경험은 신학을 형성한다. -본서 중에서

 

저자는 바울 신학을 로마서 12:1-2절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신학이란 모름지기 윤리학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신학은 삶을 위한 것이며, 바르트나 본회퍼처럼 살아낸 신학이 아니면 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신학자라면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해하면서 그에 따라 신학을 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조직 신학자가 교회의 학자로서 활동하고 싶다면, 그들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성서학자들의 학문적 기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신학자와 성서학자들 사이에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신학교에서 제도적인 장을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성서학자와 신학자가 잔을 들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잔에는 각각 성서신학과 교의신학이 채워져 있다. 그들은 함께 하나의 구호를 외친다. 

 

“교회를 위하여!”

 

잔을 비운 그들은 서로의 잔에 자신의 것을 따라 준다. 성서학자에게는 교의신학이, 교의신학자에게는 성서신학이 담긴 잔이 그들 손에 들려있다. 불편한 기색이 그들의 얼굴에 슬쩍 비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찬 주인의 인도를 따라 또다시 함께 외치며 잔을 들이킨다.

 

“오직 교회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Mar. 9.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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