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주름을 지우지마라

창고지기들 2024. 5. 18. 12:31

 

 

 

 

 

이제민의 책, <주름을 지우지 마라>를 읽고.

 

 

제법 혼쭐이 났다. 이 정도 분량의 책을 이토록 오랫동안 붙들고 읽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매우 가볍게 읽힐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시작된 독서는 더러는 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어서, 많게는 뭉뚝하게 깎아 손에 쥔 연필로 새까맣게 줄을 치다가 책장 넘기는 속도가 달팽이 보다 못하게 되어버렸다. 같은 기독교 가문이지만, 큰집이라 할 수 있는 카톨릭 신부님이 쓰신 책인지라 개신교 신자인 내게는 퍽 생경한 부분이 많기도 했을 뿐더러, 아직 못다 늙은 처지여서 깨닫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부분은 개신교 신학의 약점을 보강해준다는 점에서 좋았다. 

 

 

창세기에 따르면 시간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첫 작품이다. 하느님께서 창조 첫날, 밤과 낮을 만드셨다는 것은 시간의 창조를 뜻한다. 시간은 하느님의 작품으로 모든 때가 하느님의 창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려준다. 태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늙음도 죽음도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출산과 노동, 그리고 죽음을 인간이 죄를 지은 탓에 하느님이 내린 벌로 보는 것은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한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다.(창세 3,17-19 참조) -본서 중에서

 

 

창세기는 노동으로 고생하고 병들고 죽는 이유를 밝히기보다 인간이 그런 존재임에도 불사불명의 하느님의 영을 받아 사는 영적인 존재임을 깨우쳐 주고자 한다. 고통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늙음도 죽음도 모르는)을 본질로 하는 인간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분명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제 우리는 죽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이해는 예수님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 고백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남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는 곳에 인생의 완성이 있다. -본서 중에서

 

 

개신교 신학, 그것도 복음주의 신학은 ‘창조’보다 ‘타락’을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성취를 위한 전제 조건은 타락이다. 그러므로 개신교 신자에게 구약은 인간의 고통(늙음을 포함한)과 죽음의 원인인 타락의 기원과 이후로 펼쳐지는 인류의 죄 중독의 역사를 알려주는 말씀이고, 신약은 타락한 인류들 중 하나인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신부님의 얘기는 좀 다르다. 타락보다는 창조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의 결과이자 저주로만 알았던 출산의 고통과 노동과 죽음을 ‘징벌’이 아니라 ‘때’로 해석하여서, 시간(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비관적인 인간관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사불멸의 성령을 받은 영생을 누리는 영적인 존재라는 낙관적인 인간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순히 나의 구원을 위한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한다는 윤리적이고 모범적인 것임을 분명히 한다.

 

 

성경은 인간의 매 순간을 하느님의 창조물로 다룬다. 아담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그의 늙음에 이르는 과정도 창조하셨다. 인간이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생도 사도, 젊음도 늙음도 모두 하느님의 작품이다. -본서 중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아는 사람은 병도 고통도 늙음도 죽음도 인생을 완성하는 과정임을 안다. 이 깨달음을 통해 그는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의 삶을 살게 된다. 병도 고통도 늙음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은총임을 아는 사람은 고운 피부만이 아니라 주름살도, 행복만이 아니라 고통도 하느님의 선물임을 여유롭게 받아들인다. -본서 중에서

 

 

죽음을 형벌로 인식하도록 배워왔던 탓에, 죽음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놓인 질병이나 각종 불운한 사고나 재앙, 그리고 늙음까지 모조리 형벌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때와 기한의 창조자이기도 하셔서, 모든 순간을 선물로 인간에게 주신다.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상황과 상태 또한 선물이 된다. 결국, 늙음을 받아들면서 그것을 향유하며 살아기 위해서는 신학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늙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늙을 수 있는 기회(시간)를 주신 것은 은혜다. 그 만큼 많은 시간을 살아있음으로 인해 참 인간됨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이 때 참 인간이란 인내, 희생, 생로병사에 초연함, 받아들임,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모든 소유를 내려놓고 시간에 자신을 맡기는 존재를 말한다. 세상은 갈수록 늙음을 경멸하고 혐오한다. 하기야 성(性) 마저 받아들일 선물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로 취급하는 세상이 아닌가! 그런 이들에게 늙음은 받아들임의 대상이 아니라 질병과 함께 없애버려야 하는 악일 테다.   

 

 

노인이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은 지나온 삶의 흔적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의 표지다. 그의 주름살은 젊은이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청춘이 자신을 위한 꿈을 꾼다면 노인은 젊은이를 위한 꿈을 꾼다. 다시 젊어지는 꿈이 아니라 젊은이가 늙음에 순응하며 늙음에 감사하게 하는 꿈이다. 젊은이가 늙음을 인생이 도달해야 할 목표 삼고 살게 하는 꿈이다. 젊은이가 자기를 희생하고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꿈꾼다. 노인의 꿈은 깨달음의 꿈이다. 노인이 자기의 꿈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젊은이는 노인의 잠든 눈에서 그 꿈을 읽어야 한다. 노인은 젊은이에게 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본서 중에서

 

 

시메온은 늙어서야 이 지혜(부와 명예와 권력과 인기 등에 집착하면서 잃은 시력은 무소유 자체인 아기만이 되찾아 줄 수 있다는)에 도달했다. 시메온이 이 지혜에 도달하는 데는 늙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인내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하여 늙음에 이르도록 자기 인생을 이끌어 온 것이 자기의 힘이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순간, 그는 어린아이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인간의 모든 힘과 욕심이 씻겨나간 순수에 도달하게 된다. 비로소 인생의 맛을 알게 된다. -본서 중에서

 

 

수십 년 전, 인사동 한 갤러리에서 보았던 수묵화전은 노인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폭 속 노인들은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표정과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작가는 아이 같은 노인을 연작으로 그려놓았던 것이다. 죽음의 관문을 통해 부활의 성으로 입성하는 늙은 노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어린아이 같음인 것이다.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명이 자신이 아닌 창조주요 구원자에 의해 연명되어 왔음을 감사하며, 타자(하느님이 와 계시는 집)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참고 인내하며 희생할 줄 알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은 황혼의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육에 따라 사는 삶을 죽일 때 영에 따라 사는 부활의 삶이 열린다.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은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는다’는 중세 독일의 어느 신비가의 말을 이해한다. 인간은 그 순간이 언제일지 모르는 생물학적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죽어 부활의 삶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존재임을 노인들의 삶이 보여준다. -본서 중에서

 

 

비록 무럭무럭 늙어가는 중이나, 완연히 늙은 상태는 아니다. 푸릇했던 청년의 시절 때에 비하면, 받아들임의 능력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버릴 능력은 부족하다. 늙을 줄을 모르는 탐욕은 타인을 기다리게 하고, 희생시키려 하며, 자주 조급해하고 초조해하면서 주름을 지우고 싶어 한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신학을 교정하고, 코헬렛의 지혜를 마음 깊숙이 들여, 비우고 버리고 가볍게 하는 훈련을 하자. 늙어감을 허락하신 창조주께 감사하면서 늙음의 축복을 누릴 준비를 하자. 키리에 엘레이손! 

 

 

 

늙음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사춘기의 젊은 나이에 깨닫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 3,11) 어리석은 인간은 이를 끝내 거부할 수도 있다. 마치 시간을 자기의 것인 양 쪼개고 나누며 다스리려 하다가 오히려 시간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허무하게 살기도 한다. 이를 깨닫는 데는 인내와 긴 세월이 요구된다. 늙음은 하느님이 이런 진리를 깨닫도록 허락하신 때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늙음을 즐기자. -본서 중에서

 

 

 

#May. 18.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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