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지극히 낮으신

창고지기들 2024. 2. 17. 22:02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지극히 낮으신>을 읽고.

 

 

성서는 공기로 이루어진 유일한 책, 잉크와 바람의 범람이다. -본서 중에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권주의의 세상 귀퉁이에서 지극히 낮으신 주님을 경배했던 성자다. 이 책 <지극히 낮으신>은 그의 일대기를 시화(詩化)하여 보여준다. 저자가 노래한 프란체스코의 이야기의 주요 구성 요소는 공기와 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 잘 때 없다. 그 바람은 물로 농담(濃淡)을 조절해 그려낸 수채화를 말린 후, 완성된 그림을 독자의 눈앞에 툭 놓고 달아난다. 우글쭈글한 도화지. 저자에게 있어서 프란체스코의 일생은 맑은 수채화다.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 -본서의 첫머리

 

저자의 말대로 볼 수 있는 건 개뿐이다. 아이와 천사는 이미 사라졌다. 비록 보이진 않지만, 사라진 아이의 눈에 모든 것은 새로웠을 테다. 어른이 아이처럼 새롭게 보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낯설게 하기가 필요하다. 낯설게 하기를 통해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천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일단 천사가 포착되면, 눈을 뗄 수 없을 터. 다양한 볼거리들이 널려 있는 세상에서 시선은 배회하기 마련이나, 천사에 꽂힌 시선은 곧 방랑을 멈춘다. 응시는 바로 그 때 탄생한다. 

 

낯설게 하기와 응시는 이미 사라졌다. 다만 개가 그 뒤를 따를 뿐이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아이와 천사의 뒤를 따른다. 옴에 걸린 더러운 개는 낯설게 하기와 응시하기를 통해 쓰레기 더미에서 조차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발견한 모든 것을 격렬하게 기뻐할 줄도 안다. 그가 찾은 보물은 진리. 아는 것에 있지 않고, 우리에게 던져주는 기쁨 속에 있기에 진리의 기쁨은 식을 줄 모른다. 그래서 일까? 프란체스코의 이미지는 항상 실실 쪼개고 있는 성자다.

 

 

기쁨이 무언지 알고 싶습니까? 그게 무언지 정말 알고 싶나요? 그렇다면 귀 기울이십시오. 밤입니다. 비가 내리고 나는 배가 고픕니다. 나는 밖에서 내 집 문을 두드리며 내가 왔음을 알립니다. 그러나 아무도 물을 열어 주지 않아, 나는 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굶주린 채 밤을 보냅니다. 기쁨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본서 중에서

 

세인트(Saint) 프란체스코의 얼굴에 담긴 기쁨은 결과가 아니다. 조건이나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원인에 가깝고, 선재 조건이나 존재 자체다. 그런 점에서 기쁨의 정체는 철저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항상 기뻐하라는 사도 바울의 명령은 프란체스코처럼 기쁨의 존재가 되라는 뜻. 진리의 과녁이 되어 매순간 진리에 맞아 명중당하라는 것이다.

 

 

 

당나귀는 다름 아닌 프란체스코의 몸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 형제 당나귀’라 부른다. 이것은 몸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것으로부터 초연해지는 방법이다. 어쨌거나 이 동반자와 함께 천국으로 가야 하니까. 참을성 없는 이 살덩이, 이 거추장스러운 욕구들과 함께. 자갈투성이인 가파른 길, 노새가 가는 이 길을 통해서만 영원한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본서 중에서

 

바야흐로 애완동물의 시대. 내게도 그것이 있다. 나의 몸이다. 나는 반려 몸과 함께 매일 천국으로 향한다.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을뿐더러 거추장스러운 요구로 하악질을 해대는 반려 몸을 돌보며 길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끼니때마다 절제해서 잘 먹여야 하고, 빠짐없이 산책을 시켜야 하며, 매일 씻기고 입혀야 하고, 때때로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재밌어하는 놀이도 제공해주어야 한다. 때로 귀찮은 반려 몸을 유기한 채, 편리한 영지주의를 들여올까? 고민이 되기도 하지만, 내 주께서 가신 영원한 정상은 반려 몸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다다를 수 없기에 나는 반려 몸을 포기할 수 없다. 하.

 

 

 

인간이 자신을 알려면 이름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자아의 부재. ‘깊은 잠’과 잇따른 상실이 필요하다. 거기서 여자가 탄생한다. 창세의 최종적 개화, 창조의 궁극적인 지점이다. … 남자들은 여자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의 생명만큼이나 먼 곳에서 유래하는 두려움이다. 탄생 첫날부터 이미 존재하는 두려움. 단지 여자의 몸과 얼굴과 마음에 대한 두려움일 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여자·생명·하느님.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남자는 여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유혹과 전쟁과 일을 통해 그걸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정말로 극복하지는 못해, 영원히 여자를 두려워한다. 그는 여자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으며, 생명과 하느님을 음미할 줄도 모른다. 교회는 남자들의 산물이고 보면, 교회가 여자들을 경계하는 건 당연하다. 교회는 여자들과 하느님을 길들이려 하며, 넘쳐흐르는 생명을 계율과 제의라는 얌전한 침상 안에 가두어 두려 한다. 이 점에서 가톨릭교회도 다른 교회들을 닮았다. … 남자와 여자 간의 차이가 있다면 성(性)이 아니라 자리의 차이다. 남자는 남자의 자리를 지키는 자며, 무겁고 진지한 모습으로 두려움 속에 안전하게 자리 잡는다. 여자는 어떤 자리에도, 심지어 그녀 자신의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 자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부르는 사랑 속으로 사려져 버린다. … 성서 속엔 새들만큼이나 많은 여자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여자들이 있다. 여자들은 하느님을 낳아, 그가 자라고 뛰어놀고 죽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미친 듯한 사랑의 단순한 몸짓으로 그를 부활시킨다. -본서 중에서

 

지극히 낮으신

여인들의 하나님

믿음으로 마음을 드리오니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홀로 

받으시옵소서, 아멘!

 

 

 

 

#Feb. 17.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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