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여종
그 날은 말씀 묵상에 관한 강의를 하라고 부름 받은 날이었다. 이른 아침, 습관을 따라 말씀을 열고 들어갔다. 벌써부터 주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기도로 인사를 아뢰며 자리에 앉았다. 주님은 곧 준비해 놓은 말씀을 꺼내셨다.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 불러 이르기를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잠언 9:1-6)
나는 일련의 묵상 과정을 통해 주의 말씀을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너는 나, 지혜의 여종이다. 지금까지 너는 나의 명령을 따라 강의 준비, 곧 말씀 묵상과 관련한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었다. 이제 내가 너를 성중 높은 곳에 세워 외치게 할 것이다. 말씀 묵상의 지혜가 필요한 자, 말씀 묵상의 지혜를 원하는 자들에게 외치라. 묵상을 통해 지혜의 말씀을 먹고, 지혜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생명을 얻게 하라. 진리의 길을 걷게 하라.”
적확하고, 적실한 말씀 앞에서 나는 떨었다. 일어나 씻고 만반의 준비를 한 뒤, ‘지혜의 여종’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어색하고 딱 맞지 않는 것 같아 불편했다. 하지만 보냄 받은 종은 토를 달 수 없는 법. 불편한 옷을 입고 교회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성중 높은 곳(강대상)’에 세워졌다. 높은 곳에 서서 1시간 20분가량 말씀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과 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전했다.
강의 후, 칼칼해진 성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의 완경(完經) 선배 사라에게는 믿음으로 아들을 낳게 하시더니, 완경으로 가고 있는 나에게는 믿음으로 기어이 아들이 되게 하셨구나!’ 왜냐하면 내가 속한 교단의 방침은 오직 아들(!)만이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까닭이다.
어릴 적 청소하기 위해 강대상에 올라갔던 내게 계집아이 주제에 어디 감히 강대상을 범하느냐고 호통을 치던 장로님이 떠오른다. 그분이 지혜의 여종으로 강대상 뒤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그날의 나를 목격했다면, 아마도 기함하며 쓰러지셨을 것이다.;;
아들 됨에는 특권과 책임이 동시에 주어진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 대한 상속권과 아버지의 뜻, 곧 유지(遺旨)를 받드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나를 아들 삼으셨다. 아들인 내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권이 있으며, 동시에 내 뜻이 아닌 성부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하는 미션이 있다. 지혜의 여종이자, 동시에 성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서 내 앞의 생을 기쁨과 감사로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Oct. 21. 2023.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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