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짱을 내어주시는 주님
손을 잡고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이다. 오래 전, 대학 입학 원서를 내기 위해 아빠와 함께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훌쩍 커버린 딸과 희끗희끗 머리가 세기 시작한 중년의 아빠는 어색하게 걸었다. 그러다 먼저 용기를 낸 쪽은 딸이었다. 나란히 걷고 있던 아빠의 팔짱을 슬며시 끼었던 것이다. 아빠의 팔에는 곧 힘이 들어갔고, 딸은 아빠의 든든한 팔에 매달려 시종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누볐다. 어느새 세월은 흘러 아빠는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여전히 나는 아빠의 든든한 팔을 기억하고 있다.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언 3:25-26)
새벽에 잠언 말씀을 두드리자, 문을 열고 나오신 주께서 내게 팔을 내미셨다. 그분의 팔짱을 끼고 잠시 잠언의 정원을 거닐었다. 지나간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산적해 있던 크고 작은 웅덩이와 돌부리들, 심심찮게 출몰하는 야생 짐승들과 못된 자들이 뿌려놓은 덫들이 기억의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를 타고 지나갔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분의 든든한 팔을 보았다.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걸려 넘어지거나,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고 오늘도 걷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분의 팔을 의지한 덕분이었다. 그분의 든든한 팔짱을 끼고 걸은 덕분에 돌부리에 걸려도 쓰러지지 않았고, 웅덩이에 빠져도 곧 구출되었으며, 야생 짐승과 못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조바심이 마음에 진주한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업과 과제라는 적당한 빌미로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면서 평강에게 좀처럼 의자를 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는 가면을 쓴 빈 둥지 증후일지도 모른다. 이십년 넘게 수행해 오던 사명인 양육을 잃은 상실감이 나를 조급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평강이 부재하는 마음의 현관문을 수시로 두드린다. 악인을 향하는 심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도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가을은 근면하다. 신실하게 스산해지는 가을과 함께 나 역시 더욱 성실하게 그분의 팔짱을 끼기로 한다. 따뜻하고 든든했던 아빠의 팔짱을 추억하며, 그분의 의로운 오른 팔을 꼭 붙들고 내 앞에 놓인 생의 길을 즐겁게 걸어가기로 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Oct. 7. 2023.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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