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엘로힘!
묻어두는 것 외에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시기가 있다. 그것을 해석할 틀이 수중에 없는 까닭에, 그 시기 전체를 X파일에 집어넣고 잠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지나가던 시간이 어느 날 문득 적당한 해석의 틀을 선물처럼 건네기도 한다. X파일을 열어볼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런 때다.
고난으로 압도당하던 시절. 여호와께서 다스리는 인과의 세상에서만 살아온 나는 그것을 ‘징계’로 해석했다. 회개와 자책이 앞 다투어 거듭 실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용서와 해방이 끝도 없이 지연되면서 나는 차츰 나를 어둠 속에 유기해 버렸다. 어둠 속을 헤매는 일이 익숙해진 어느 날, 역설을 아는 지혜가 덜컥 발견되었다. 고난이 ‘훈련’으로 해석되기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자책과 회개를 통한 빚을 갚는 일은 곧 중단되었다. 대신에 더 낫고 영구한 것을 위해 저축하는 기쁨이 고난에 배여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징계가 되었든, 훈련이 되었든 인과의 세상에서 고난은 그저 지긋지긋한 고난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 보니, 그 시절은 엘로힘이 다스리던 인과가 아닌 확률의 세상이었다. 여호와와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나는 확률에 따른 공평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언약에 따른 특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까닭에, 다른 이들과 똑같이 받던 평등한 대우가 유독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내 고난의 정체였을 지도 모른다. 특혜에 절어있던 탓에 당연한 것을 오히려 고난으로 느꼈던 것이다.
결국, 그 시절의 나는 부자였다. 특권과 특혜에 취해있던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할례 받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래서 요나처럼 참람하게도 감히 하나님의 멱살을 잡고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윽박을 질렀던 것이다.
무릇 징계(훈련)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브리서 12:11)
이제는 안다. 하나님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듯이, 나 역시 그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분이 자기 멋(뜻)대로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분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거룩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렴! 그러나 그 쉽지 않은 일을 어렵사리 해나갈 때, 의와 평강의 열매는 맺히고야 만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또한 엘로힘이시다. 나를 선택하여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다른 피조물들과 평등하게 대하시는 하나님! 높임을 받으소서, 할렐루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브리서 12:12-13)
#Sep. 30. 2023.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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