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읽고.
떠나온 나라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 아름다운 땅이 하루아침에
전쟁터가 되었다는 소식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내 편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선은 중보기도,
그 다음은 피난 나온 선교사님들을 매주 말씀과 기도로 위로하고 격려하기,
그리고 그 다음은 독서.
독서는 나의 사랑하기 방식이니까.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엎드린 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을 뒤집어 보니 그가 죽어 가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된 것을 마치 흡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무척이나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서 마지막 부분
이 책이 무슨 연유로
내 책꽂이에 서식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귀국한 후에 이 책을 구입했고,
책은 마치 이 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내 손에서 눈을 통해 머리와 마음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주인공 파울 보이머와 입대한 뒤,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다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을 읽은 적이 있다.
무려 삼십 몇 년 전에 말이다.
대학 일 학년이었던 나는
그것을 개집을 닮은 여학생 기숙 6호에서 읽었고,
그 중 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나중에 그 문장을 수첩에 적어두기도 했는데,
주인공 라빅이 여배우 조안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음 속 진실을 말로 내뱉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는 지를 토로하는 대사였다.
청춘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던 나의 고민이
레마르크의 것과 비슷하여 퍽 인상적이었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만나게 된 레마르크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제 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헛된 애국심에 고양된 담임교사 칸토레크의 선동으로 입대한
같은 반 친구들의 전쟁 이야기다.
화자인 파울 보이머의 앳된(?!) 목소리를 통해
현재 시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관계로
소설은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전개된다.
사실감, 생동감이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데,
애석한 것은 그것이 전쟁 이야기에 수종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매양 끔찍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처연하다.
하지만 화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짝이 없다.
마치 감정이 없는 카메라처럼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형편을 차갑게 담아 선보인다.
그 결과 전쟁의 참상이 더욱 오롯이 전달된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우연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만약 포탄이 날아오면 몸만 웅크릴 뿐 달리 아무런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게 어디로 가서 터질지 나는 정확히 알 수도 없고 어떻게 여향을 끼칠 수도 없다.
이런 일이 우연하게 일어나다 보니 우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
포탄에 맞는 것도 우연이듯이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포탄으로부터 안전한 엄폐부에서도 나는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엄폐물이 없는 전쟁터에서 열 시간 동안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다.
어떤 군인이든 온갖 우연을 통해서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리고 군인이면 모두 이런 우연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독서는 중에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 책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고 있었다.
파송되었던 선교지 케냐는 서부전선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미션 수행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파울의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전쟁 이야기는
고스란히 케냐에서 고군분투하던 나의 이야기로 읽혀졌다.
그래서 몰입도와 가독성이 높았던 것 같다.
파울이 말하는 ‘우연’이 내게는 ‘섭리’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
케냐를 넘고 우크라이나를 건너 도착한
대한민국에서의 일상은 겉보기에 안전하고도 안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의정일 뿐이다.
표면을 살짝만 까보아도 그 안에 포탄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곳의 일상에도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포탄이 난무는 중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이렇게 무사할 수 있는 것은
파울의 우연이자, 나의 섭리 덕분이다.
수없이 많은 포탄이 지금도 내 머리 위에서 소리 없이 터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그것의 기습을 당할는지 모른다.
나는 그저 섭리를 통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성도라면 모두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신뢰해야 한다.
말하는 소리를 잘 들어 보니 카친스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온몸에 알 수 없는 온기가 넘쳐흐른다. 이 목소리,
이 몇 마디의 나지막한 말들, 등 뒤의 참호 속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하마터면 내가 빠질 뻔한 죽음의 공포로 인한
끔찍한 고독으로부터 나를 단숨에 끌어내 준다.
이 소리는 내 생명 이상의 것이고, 이 목소리는 모성애와 불안 이상의 것이다.
그 소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강한 소리이고 더 안전하게 나를 보호해 준다.
그건 내 동료들의 목소리다.
나는 이제 어둠 속에 혼자 떨고 있는 한 조각의 목숨이 아니다.
나는 이들의 일원이고 이들은 나에게 소속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공포와 목숨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단순하고도 힘든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내 얼굴을 이들 속에, 이 목소리에 파묻고 싶어진다.
나를 구해 준 이 몇 마다의 말이 나를 도와줄 것이다.
-본서 중에서
무엇보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책감이었다.
우크라이나를 떠나 피난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백성과 함께 고난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까닭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책망하고 비난하며 괴로워했다.
이미 그 백성들과 함께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물리적으로 함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과도한 자책감은 어쩌면 선교사로서의 명예와 영광에 대한
숨겨진 정욕일 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이생의 자랑이라는 자기 욕망일랑은 시원하게 부정하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자고 독려했다.
각자 자기편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구원일랑은 모조리 하나님께 맡기자며 의기투합했다.
우리는 동료다.
빗발치는 포탄에도 불구하고 미션과 살아남기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전우다.
그 와중에 우리는 혹여 라도 어둠 속에서 혼자 떨고 있지 않도록
서로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준다.
괜찮으냐며 서로의 안위를 살펴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일원이 되고 소속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운 연합을 맛보아 알아간다.
전쟁 통의 파울과 같은 반 친구들처럼.
키리에 엘레이손!
#Mar. 12.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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