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창고지기들 2022. 3. 26. 10:21

 

 

 

 

오대원의 책,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을 읽고.

 

 

‘이 책을 안 읽었었어?’


원고 집필을 위한 자료를 찾다가 책꽂이에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을 빼냈을 때였다. 

밑줄 하나 없는 깨끗한 책장의 지면이 

무슨 일이냐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읽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어쩌다 그런 착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책의 내용을 대강 알고 있었기에, 

읽지 않았을 리 없다고 오인했던 것 같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혹은 착각에 대한 벌로 

처음부터 꼼꼼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히 뻣뻣했다. 

낯짝이 두껍고 뻣뻣한 질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작부터 을(乙)이 되어버린 나는 마지막까지 책장들을 참고 견뎠다.

 


책은 일종의 묵상 세일즈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용은 묵상의 의미, 묵상의 대상인 말씀의 의미, 

역할, 가치, 능력에 이어서 묵상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다양한 조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책이 지목하고 있는 독자군(讀者群)에 들지 못한다. 

이미 수십 년 전 부터 묵상을 해오고 있고, 

심지어 다양한 묵상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놓치고 있던 것들을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1. 

어린아이가 말하는 법을 생각해 보라. “아버지의 말을 들음으로써 배운다”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법을 배운다. 하나님 자신의 말을 따라함으로써 그분께 기도하기 시작한다. …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난다. 확신과 기쁨으로 기도하기 원한다면 성경말씀을 토대로 기도해야 한다. …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는 방법이 된다.” … 중보기도자는 언제나 예배자요 묵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중보는 단지 인간의 욕구를 표현할 뿐이다. 묵상하는 자는 예배로서 드리는 묵상 자체가 우리를 더 깊고 높은 예배의 경지로 이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서 중에서


“사모님, 기도 잘 하네요. 

기도하는 거 어디서 배우셨어요? 

거 어디 기도 학교예요? 나도 배우고 싶어 그래요.”


수년 전 기도 모임 직후, 경상도 사투리로 쏟아진 

어느 선교사님의 질문 앞에서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통성 기도 시간에 

시종일관 내 기도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배우긴 어디서 배워요. 

말씀 묵상을 오래 해서 그런가?”

 

묵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자 예배라는 사실을 절감했던 순간이었다.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들음으로써 말하기를 배우는 것처럼, 

나 역시 아버지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기도하기를 배웠던 것이다. 

말씀의 사람이긴 해도, 

기도의 사람은 아직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것은 틀렸다. 

말씀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말씀 묵상가인 동시에 기도자로 성장하는 중이다.

 


2. 

종은 하나님이 깨우시고 새날을 맞게 하심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종인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달려 있다. 하나님이 아침에 깨우지 않으시면 이 세상의 어떤 다른 능력도 우리를 깨울 수 없다. 그러므로 날마다 잠에서 깰 때, 아니 깨움을 당할 때 우리에게 하루를 더 주기로 하신 하나님의 선택에 깊이 감사함으로 응답해야 한다. -본서 중에서

아침마다 꾸역꾸역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저자의 지적이 새삼스러웠다. 

하나님이 깨우지 아니하시면 하루라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선물을 선사하기 위해서 깨우신 하나님 덕분에 

나는 오늘도 하루를 받아 향유하는 중이다. 


슬픔은 어제의 것이다.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날이다. 

죄와 상처는 어제와 함께 과거로 보내고,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기쁨을 창조해보자.

 


3. 

십자가 앞에서 성령이 마리아가 오래 전에 묵상했던 말로 그녀를 위로하셨을 때, 마리아는 처음 묵상했을 때보다 더 큰 위로와 지혜를 받았을 것이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힘이 되는지! 묵상하며 성령이 내 안에 심으시도록 한 성경말씀은 들을 때마다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축복이 묵상하는 자를 위해 예배되어 있다! 오늘 말씀을 심으시는 성령이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수개월, 수년 동안 내 삶을 풍성케 하시고 나를 통해 다른 이들을 풍성케 하신다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수도 없이 뿌려졌던 말씀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다. 

그것이 순간마다 나를 지탱해주고, 끌어주고, 밀어주고 있다. 

지적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지혜까지 선사하고 있다. 

그렇게 풍성해지는 말씀이 내 울타리 담장을 넘고 있다. 

내 지체들에게까지 뻗어나가 그들로 말씀의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오, 놀라워라!

 


4. 

묵상 없는 성경 공부는 완전하지 않다. 바람 부는 사막과도 같이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경건한 성경 공부가 없는 묵상은 그보다도 더 위험해서, 사람들을 감성주의나 심지어 신비주의의 깊은 구덩이에 빠뜨리기도 한다. 부지런하고 깊이 있게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묵상은 열매를 매지 못한다. 성경 공부와 묵상은 병행되어야 한다. 묵상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로 헌신한 삶에 열매를 맺게 한다. -본서 중에서


성경 공부와 연구 없는 묵상은 상상해 본적도 없다. 

기초를 닦지 않고서는 건물을 세울 수 없는 것처럼, 

묵상은 성경 공부와 연구 없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묵상은 언제나 성경 공부와 연구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묵상가는 성경 공부와 연구를 디딤돌 삼아 

묵상을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하지만 묵상가가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결정에 달려 있다. 

묵상가의 본분은 딱 거기 까지다. 

성경 공부와 연구를 기반으로 묵상을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 까지. 

그 다음 일은 전적으로 주님의 소관이다. 

다행한 점은 주께서 앉으신 자리가 

무려 ‘은혜’의 보좌라는 것이고, 

주께서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할렐루야!

 


5. 

묵상할 때 ESV, NASB, RSV 또는 개역한글과 같이 ‘본질적으로 문자 그대로인’ 번역본을 사용한다면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NIV, NJB 또는 공동번역과 같이 ‘생각vs생각’ 번역본을 사용한다면 개개의 단어보다 한 절 전체에 초점을 두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본서 중에서


번역본에 따라서 

묵상의 방식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지적은 옳다. 

그런 점에서 내게는 개역개정과 NIV이 맞다. 

전체 문맥과 해석을 중심으로 

단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묵상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때가 되면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묵상도 하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생각을 중심으로 하는 묵상이 재밌다.

 


6.

관찰은 인생 전체에 대한 관점을 바꾼다. 관찰은 효과적인 공부의 비결이며 예술이나 관계에도 꼭 필요하다. 미국 남동부의 저명한 조경 예술가 웨스트 프레이저(West Fraser)는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사용한다. 나는 반응하고 관찰한다.”고 말했다. 관찰은 효과적이고 열매 맺는 묵상으로 인도한다. -본서 중에서


관찰이란 대상을 주목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묵상을 위해 성경을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그것은 관성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레 내 자신과 가족과 이웃도 관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방법들 중 하나가 

관찰임을 깨닫게 되었다. 

관찰을 통해서 나는 현재를 뜨문뜨문 즐기는 중이다.

 


7. 

무엇보다 영의 메마름, 또는 황량함의 시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묵상하는 사람들은 모두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이 표현했던 ‘영혼의 어두운 밤’을 언젠가는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어둔 밤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폰 발타자르는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에 있다는 신호, 즉 위로의 신호다. 비록 위로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본서 중에서


본격적(!)으로 묵상의 길에 들어 선지 20년이 넘었다. 

그동안 숱한 음침한 골짜기들과 영혼의 어두운 밤들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루도 포기한 적이 없었던 것이 성경 묵상이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문득 알게 되었다. 

재미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내면의 본성’, 

혹은 ‘내적인 기쁨’이라고 고상하게 표현했지만, 

내게 그것은 그저 재미다. 

나는 말씀 묵상이 재밌다. 

20년 넘게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재밌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고 괴로웠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고 않고 지금껏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한 사람이 갑작스레 묵상 모임을 나갔다. 

대신에 오래 기다려온 다른 한 사람이 묵상 모임에 들어왔다. 

말씀은 변함이 없는데, 나의 상황은 변화무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정해진 본문은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고, 

매주 우리들은 에셀나무 아래 마련된 주인의 상에 앉아서 

말씀을 나누면서 먹고 마신다. 


말씀이 떨어지지 않는 한, 잔치는 계속될 것이다. 

설사 포도주가 조기에 소진되어 

잔치가 끝장날 판이라 해도 염려할 필요는 없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실 주께서 

잔치의 주인이시니 말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Mar. 26. 2022. 글 by 이.상.예.


 

 

 

 

 

 

 

'그 여자의 보물창고 > HIS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소부 매뉴얼  (0) 2022.04.23
아르미안의 네 딸들  (0) 2022.04.09
서부 전선 이상 없다  (0) 2022.03.1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0) 2022.02.26
지식인의 옷장  (0) 2022.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