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생각 버리기 연습

창고지기들 2012. 7. 28. 18:31

 

 

 

 

5년 전 미국 유학 생활 당시

내 삶의 모토는

‘Carpe Diem(현재를 즐기라!)'이었다.

허나, 그 당시 읽었던

대지의 성자 애니 딜라드의 책

‘자연의 지혜(Pilgrim at Tinker Creek)’을 통해서

나는 내게는 현재의 일상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애니 딜라드의 책을 통해서 나는 내 스스로를

‘생각 중독자’(내가 만들어 낸 신조어임!ㅋ)로 진단했고,

바로 그 생각 중독으로 인하여

현재를 즐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나는 말씀에 집중하는 묵상을 방법으로 채택하여

더욱 치열하게 말씀 묵상을 했다.

 

그 후로 말씀 묵상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임재 연습’으로 이어졌고,

말씀 묵상은 하나님의 임재 연습 안에서

삶의 여러 국면과 융합되면서

내겐 없어서는 안 될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 곳 케냐에서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 연습 안에서

말씀에 집중하며 묵상을 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 곳 케냐에서의 삶은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하다.

왜냐하면 가만히 들어온 불법한 영들이 일으키는

헛된 생각의 잡음들은 이전에 경험한 것들 보다

훨씬 더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집요하게 터져 오르는

불법한 팝 업인 헛된 생각의 잡음들을 삭제하느라

종종 피곤에 지치곤 한다.

이 와중에 그 동안 수련해온

하나님의 임재 연습과

말씀 묵상 훈련도 종종 맥을 못 출 때가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 분은

내게 뜻밖의 책을 내미셨다.

그것은 코이케 류노스케라는

일본인 스님(!)이 쓰신 ‘생각 버리기 연습’ 이라는 책이었다.

(그래서 조금 주저하기도 했다!)

이 책은 불교의 팔정도를

현대인에게 맞게 쉽게 상황화하여

구체적인 방법론과 함께 소개해 주고 있었다.

 

 

저자는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은 ‘생각 병’으로서

현대인은 헛된 잡념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충족감을 느끼기 어렵고,

또한 망상에 탐닉한 결과 현실감도 사라지고,

행복감도 사라져 버렸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불교의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

자기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늘 지켜봄으로써

마음을 헛된 잡념으로부터

돌이키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감각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것인데,

‘보인다’를 ‘본다’로, ‘들린다’를 ‘듣는다’로,

‘냄새가 난다’를 ‘냄새를 맡는다’로,

‘맛이 난다’를 ‘맛 본다’로,

그리고 ‘느껴진다’를 ‘느낀다’로 바꾸어

감각 그 자체에 머물며

정신을 통일(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들끓는 생각의 잡음들을 조용히 시킨 후엔

생각의 잡음들을 허용한

마음의 상태(번뇌)를 관찰하여

그것을 객관화하고 대상화시킴으로써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필요한 것만 생각하여

항상 평상심을 지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마음은 보다 강한 자극을 위해 내달리는 습성이 있고,

또한 불쾌한 자극을 받을 때 생기는 두근거리는 느낌을

기분 좋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진짜 불쾌한 일을 쾌락으로 바꾸어 받아들이게 하는

특징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철저히 관찰하고 감시함으로써

능동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전에 애니 딜라드의 책을 읽고

내가 만들어냈던 ‘생각 중독’이란 말은

코이케가 이야기했던 ‘생각 병’과 거의 같은 것이다.

(놀라움! ㅋㅋㅋ~)

그리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내가 말씀에 집중한 것 또한

그가 소개하고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나, 불자인 그와 기독교인인 나에게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이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불자답게 그는 자신이 절대적인 주체가 되어

치열한 혼자만의 수행을 통해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수행(修行)은

불교의 수행과는 다르게

절대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수행은 함께 하는 수행으로서

성령님과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불교와는 다르게

인간이 철저한 주체가 되어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반드시

누군가(성경 말씀과 성령님과 지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저자는 불교에서는

부처마저도 ‘감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무조건 감사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은연중에 기독교를

염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괜한 자격지심 때문일까?^^;)

 

이와 같은 저자의 비판은

그가 생각하는 감사의 정의 때문인 듯싶다.

저자가 말하는 감사란

무언가 예상 외로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일이

생겼을 때 느끼는 기쁜 감정이기 때문에

별로 감사하지 않을 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허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감사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대자를 대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은

감정을 속이는 거짓 행위가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의 믿음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에 집중하여

마음의 헛된 잡음을 떨쳐버리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방법을

나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이미 터득하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자기수행의 신동이었는지도 모른다...ㅋㅋ~)

 

그 당시 나는

치통으로 무척 고생을 했었는데,

무지 어렸던 나는 영특하게도

치통이라는 통증에 집중함으로써

치통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곤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인데,

(그 어린 나이에 팔정도의 수행을 스스로 터득했으니!ㅋ)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싶다.

 

프레드릭 뷰크너가 말했던 것처럼

그 분의 존재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했던

내 어린 시절의 무정형들도

온통 그 분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말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이제 시끄럽고 자극적인

헛된 생각의 잡음일랑은 꺼버리고

그 분의 선하심을 능동적으로 맛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모든 존재의 감각을 열어

오직 그 분께 집중할 일이다.

 

 

 

#Jul. 28. 201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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