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상처받지 않을 권리

창고지기들 2012. 6. 22. 22:08

 

 

 

“어느 날 한 남자가

문득 자신이 독화살을 맞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언제 어디서 독화살을 맞았는지도

 몰랐다.

 

서둘러 그는 독화살을 뽑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독화살을 뽑아내려고 힘을 줄수록

독화살은 더욱 집요하게 그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독화살이 일으키는 극한 통증을 참다못한 그는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허나,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 역시

그처럼 독화살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화살을 더욱 예민하게 느끼는 그는

고통 속에서 독화살을 시와 소설로 풀어냈다.

 

또한 독화살을 맞은 엘리트들은

해독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독화살의 독을 이성적으로 분석했다.

 

허나, 독화살을 맞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독화살을 맞은 지도 모른 채

무감각하게 서서히 죽어갔다.

 

 

그렇게 독화살을 맞은 자들은

무감각하게 죽어가거나,

자신의 통증을 그저 문자로 쏟아 내거나,

아니면 해독제를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미 독에 감염된 온전치 않은

몸과 정신을 가지고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독화살의 독이 주는 고통이

극심했던 탓인지,

독화살이 어디로부터 날아왔는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위의 이야기는

그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나름대로 각색해 본 것이다.

내가 독화살의 비유를 이렇게 각색해 본 이유는

철학으로 대중적인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강신주님의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읽은 후,

‘독화살의 비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독화살의 비유로 이 책을 재조명해보면,

저자는 산업자본주의를

독화살로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산업자본주의의 기표라고 할 수 있는

대도시와 돈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미 독화살을 맞은 그들이다.

 

 

 

독화살을 맞은 그들은

크게 세 가지로 반응을 한다.

 

먼저, 독화살을 맞은 대부분의 대중은

독화살의 존재도 모른 채

무감각하게 서서히 독에 의해서 죽어간다.

 

이에 반해 일부 문학가들은

독화살의 고통을

예민하게 문학으로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소수의 철학자들은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

독의 성분을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상처받지 않을 권리’라는

책의 제목이 조금 뜬금없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들은

예외 없이 독화살을 맞아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저자의 꼼수(?!)가 드러난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자신이 산업자본주의라는 독화살을 맞고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그리고 그것의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산업자본주의로부터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이다.

 

즉, ‘상처받지 않을 권리’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처럼 천재적인 작가의 문학 작품을

 해석할 줄 아는 능력과

높은 철학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그 자체로 무척이나 아이러니하다.

자기 책에서 그토록 비판하고 있는

산업자본주의의 도구인

‘(계급)구별 짓기와 (지적)허영심’을

저자는 고스란히 사용하여

이 책을 팔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암튼, 저자는 더 이상 산업자본주의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네 명의 문학가들과 네 명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확실한 자기 논리와 아주 쉬운 설명으로

나긋나긋 친절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특별히 저자는

독화살의 상처를 겉으로 표현한 문학가와

독화살의 상처 내면을 해부하여 살핌으로써

그 독의 정체를 파헤친 철학자를

 한 쌍 씩 짝을 짓는다.

이는 굉장히 흥미 있는 짝짓기인데,

저자는 각각의 짝들이 역사를 타고

조금씩 변화 발전해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짝지어준 문학가와 철학자는

 

1번, 이상과 짐멜

2번, 보들레르와 벤야민

3번,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그리고 마지막 4번은 유하와 보드리야르다.

 

 

 

분명히 저자는 좋은 퀼터(quilter)다.

즉, 그는 자기가 구상한 작품에

꼭 필요한 헝겊 조각들을 잘 골라내어

그것들을 적절히 배치한 후 꼼꼼히 꿰맸다.

그렇게 그는 알맞은 문학가들과 철학자들을 선별했고,

또한 그들의 저작들로부터 알맞은 인용구를 선별하여

난해하지 않고 아주 명쾌한 퀼트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저자가 자신의 지적 취향(!)에 따라 선택한

여러 헝겊 조각들 중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편협(!)하고도 단순화된 이해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는

오직 ‘초월성’만 이야기하는 신앙이자,

현재는 오로지 내세와

다가올 미래 심판을 위한 준비라는

내세 중심적이고 미래주의적인 허접한 신학이며,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윤리에 영감을 준 한계가

눈에 보이는 사상일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소위 기독교인인 나는 말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신의 초월성보다

신의 내재성에 더욱 포커스하면서

산업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동시에

현재를 즐기고 놀이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인격이신 그 분의 말씀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면서 말이다!)

 

 

만일 저자가 이런 나를 가리켜

놀이의 아비투스를 습득한

투르니에의 소설 속 로빈슨처럼

허무한 기독교와 산업자본주의를 극복한

니체의 초인이라 부르려 한다면

나는 무조건 사양할 것이다.

나는 니체교의 니체의 말씀을 따라

초인이 되려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성경 말씀을 따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기 되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편협하고

 단순화된 기독교 이해는

자기 작품의 논리를 위해서 인 듯싶다.

그의 책에서 기독교는 준조연급으로

무척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캐스팅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이토록

편협하고 단순화시켜 쓰고 있는 저자의 글은

잘 분별하고 의심하면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산업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그리고 나를(!) 이해하는데

참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까지 나는 북미 문화권,

즉 산업자본주의 아래서

 태어나고 양육 받았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가 부어 만든 우상을

내 마음 깊숙이 가지고 살아왔다.

그렇게 자본주의 우상은 계속해서

내 사고와 행동과 취향에 집요하게 관여했고,

심지어 나의 신앙생활과 사역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고 있다.

물론, 이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내 지난날의 생활과 사역을

찬찬히 다시 들여다보았고,

그 속에서 자본주의 우상의 흔적을

아프도록(!)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북미 문화권에 있는 교회는

그 어떤 이단보다 산업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저자가

그토록 만들고 싶어 하는

산업자본주의 독화살의 해독제는

다름 아닌 예배와 교회 공동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돈을 신으로 섬기는

 산업자본주의라는 독화살이

(대도시, 돈, 노동, 소비, 상품,

백화점, 도박, 매춘, 소비, 허영, 구별 짓기,

미적 취향, 쾌락, 트라우마, 욕구, 욕망,

권태, 향수, 개인주의, 고독,

유행, 패션, 선전, 사치,

비인격화 등으로 표현되는!)

돈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기도의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통해

해독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산업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사회를 기대한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기대에 동조하지 않는다.

산업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 역시

또 다른 종류의 독화살을 날릴 것이

자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를 자명한 사실로

이야기하는 것은

나는 이미 독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산업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사회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이 계속되는 독화살의 사회에서

영원한 실재이신 그 분의 산 제물로 예배를 드리며,

그 분의 뜻을 분별하여 그 분과 그 분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나는 지금 여기 케냐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키리에 엘레이손!

 

 

 

#Jun. 22. 201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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