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네가 누구냐?

창고지기들 2025. 1. 4. 11:48

 

 

 

 

 

네가 누구냐?

 

 

다시 도래한 혼돈기(混沌期). 덕분에(?) 일상도 건강도 찌그러지는 중이다. 누군가 혼돈은 아직 판독되지 않은 질서(Chaos is order yet undeciphered)라고 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말이다. 시간이 흘러 역사의 그물에 포획이 되고 나면, 혼돈기 역시 질서를 따라 가공되어 질 것이다. 말로 지어진 역사의 진열장에 자기 주소를 가지고 안착한 혼돈기가 어디 한둘인가!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편이자, 어려운 시기일수록 아름다운 것을 간직하라는 블레즈 파스칼의 조언을 따라 나는 월터 부르그만의 <구약신학>을 읽기 시작했다. 1,000 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과 깊이 있는(어려운) 내용으로 오래도록 천천히 읽기에 그 만한 책도 없는 까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나를 찾아와 다짜고짜 물었다. “네가 누구냐?”(요한복음 1:19) 나는 대답했다. “나는 신학자가 아니라.” 그러자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누구냐? 네가 목회자냐?” “나는 아니라.” 그들이 또 물었다. “네가 사역자냐?” “아니라.” “그렇다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반드시 너의 정체를 듣고 말겠다는 그들의 집요함이 뾰족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답을 내놓아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나는 세례 요한의 에코(echo)가 되기로 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러자 그들이 진짜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신학자도, 목회자도, 사역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네까짓 게 <구약신학> 같은 책을 읽느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읽는 거야. 신학자도 목회자도 사역자도 아니니까.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교단이나 강대상이나 혹은 강단이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니까 소리 내어 읽는 거라고.”

 

 

이스라엘의 변증적인 찬송시들(polemical doxologies)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이스라엘은 혼돈의 주장들을 거부했으며, 삶을 부정하는 세력들 앞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에 움츠려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담대한 증언 속에서, 불가항력적인 용어인 창조하다란 동사를 (그리고 이 동사의, 보다 덜 이질적인 동의어들을) 움켜쥐었다. 이런 동사들의 사용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 동사들의 주어이자 주체이신 그분의 이름을 알 되, 이 동사들을 실행하고 구현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능력 있는 그분의 이름을 알고자 했다. 언어적 표현들이 이 동사들의 사용을 통해, 혼돈은 결정적으로 내어 쫓기어졌다. 또한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증언은 하나의 장소와 위치(안전하고 마른 땅)를 마련해주는데, 이곳은 이스라엘과 세상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장소이다. -월터 부르그만의 <구약신학> 중에서

 

 

그리고 모든 주제에 대한 야웨의 이러한 모든 약속들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현금의 상황에 굴복해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종국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특히 이 현실 상황이 극단적으로 위험하고 측량할 수 없이 보일 때라도, 그 상황에 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기이한 증언은, 현실 상황을 근본적으로 전복려하는 의도의 신학적인 천명을 제시하고 있다. 사라의 무자함 이래로,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은 야웨의 의도(intention)와 실질적인 경험의 상황(circumstance) 사이에는 뿌리 깊은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불일치를 직면하여, 이스라엘은 많은 대안들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삶의 상황을 참된 실체의 상태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를 들어, 사라는 무자했고 그러기에 약속은 한 세대 안에서 무효화되어진다. 순경과 역경의 모든 정황 속에서 이스라엘이 선택했던 대안은, 야웨의 맹세를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리라는 결연한 의지로 받아들여 거기에 의지함으로써, 그 결과 실체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맹세이지 상황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의도함에 비추어, 이스라엘은 이렇게 표현된 증언을 자신의 삶의 참된 이해로 받아들이 수용했다. -월터 부르그만의 <구약신학> 중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빛이 있기 시작한 그 사이인 ‘그러자’가 얼마만큼의 기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일지도 모른다. 말씀과 실질적 경험 사이의 불일치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그러자’의 길이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맹세)을 실재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기로 선택한 이들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현실 부정이라고 매도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말씀은 이미 떨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의 성취는 묘연해 보인다. 심지어 말씀이 일시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기대하는 중에 기다리는 소망의 백성이 이스라엘인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네가 누구냐?”고 묻는 그들의 집요한 물음에 대답할 말을 또 하나 챙긴 셈이다. “나는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신자(信者)다.” 키리에 엘레이손!

 

 

 

 

#Jan. 4. 2025.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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