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최애 사도 요한
며칠 전, 백여 만의 폭설로 남편이 귀가하지 못했다. 덕분에 꼬박 이틀을 벙어리로 지내야 했다. 누구와도 말 섞을 기회가 없던 까닭이었다. 자연스레 갇힌 기분이 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여가는 눈처럼 급격히 살찐 우울감이 마음의 잔가지들을 무참히 꺾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떨어진 곳은 사도 요한의 밧모 섬. 그 곳에서 나는 그의 소매를 꼭 붙든 채 그를 따라다니는 중이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요한계시록 1:9)
신약 성경 속 나의 최애 캐릭터 사도 요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한 일로 밧모라 하는 섬에 갇혔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결과로 외롭게 고립되었다. 육체적인 고난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모든 인격적 관계가 끊어진 탓에 사랑(관계)의 사도 요한은 거의 죽을 지경이었을 테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계시록을 집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방이 차가운 어둠으로 밀폐된 관 속 같은 현실이야 말로 열린 하늘 문을 통해 계시를 엿볼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을 테니.
그러고 보면, 케냐는 나의 밧모 섬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꼼짝없이 갇혀 외롭게 고립되었던 까닭이다. 케냐에서 선교사로 살았을 때,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것들 중 하나는 현실감 결핍이었다. 중력이 유독 나의 양발에만 예외를 둔 것처럼, 나는 땅이 아니라 마치 공중을 걷고 있는 듯 한 멀미를 견디면서 지내야만 했다. 훗날 그것은 인격적 관계들의 단절에서 오는 이상 증상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존재하는 법. 괴로운 고립감 속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을 갈구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와 공동체를 깊이 비춰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로고스씨와 연애하기>도 출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요한계시록 1:19)
가만히 있어도 자동 재생되는 시뮬레이션이 있다. 여러 케이스를 가정한 채, 그 속에 나를 대입시킨 뒤 가동을 시켜보는 것이다. 우울감의 집요한 영향 때문이지, 그 어떤 케이스에서도 마음에 드는 내가 발견되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서 꼼짝 없이 갇혀서 외롭게 고립된 채, 고통과 환희의 역설 속에서 글을 짓고 있는 내가 제일 현실적으로 느껴질 뿐. 성경을 통해 보았던 것, 혹은 지금 보고 있는 일, 그리고 장차 보게 될 일을 기록하는 내가 가장 나답게 느껴질 뿐이다.
내게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요한계시록 3:15)
대학원 마지막 학기가 사실 상 끝난 상태다. 제출해야 할 페이퍼들은 벌써 마무리 되었다. 끝과 시작이 디졸브(dissolve) 되는 구간에 들어섰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나를 가둘 것인지, 아니면 나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할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사도 요한이 나의 최애가 되었을 때부터. 키리에 엘레이손!
#Nov. 30. 2024.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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