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호박을 위한 간구
#1.
멀쩡할 리 없었다. 기근이 횡행하던 땅에 버젓이 남아있는 들호박이라니! 웬 횡재냐며 덜컥 따서 먹기 전에 한 번쯤 의심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엘리사는 걱정 하나 없이 해맑기만 하시고, 무작정 제자들을 위한 국을 끓이라고만 하셨다. 하는 수 없이 일단 큰 솥을 걸고 물을 끓이기 시작은 했지만, 이 흉년에 넣고 끓일 채소 구하기가 쉬울 리가. 그러던 중에 들 포도 덩굴에 엉겨있던 들 호박을 발견했으니, 역시 우리 선지자님은 다 계획이 있다며 냉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알맞게 조리된 국을 먹을 때가 되었다. 갑자기 자기 몫의 국을 맛본 제자 하나가 외쳤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왕하 4:40)
먹다가 죽든지, 아니면 먹지 못해 굶어 죽든지 해야 할 판이었음으로 잔뜩 예민해진 제자들, 그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깨트리는 말 한마디.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왕하 4:41)
무심하게 솥에 가루를 뿌리는 엘리사.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왕하 4:41)
해독된 국은 제자들의 생명 양식이 되고, 그것을 먹은 자들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된다.
#2.
단발성 큐티 원고 집필을 부탁받았다. 우연한 기회에 쓰게 된 원고는 어쩌면 일종의 들호박이었는 지도 모른다. 급하게 냉큼 픽업되어 원고 집필을 시작한 뒤, 탈고된 원고를 다시 읽어보니 갑자기 신물이 넘어왔다. 재미는 하나도 없고, 진부하고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던 까닭이었다. 물론, 모름지기 큐티 원고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최대한 풀어내고, 묵상할 포인트를 집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점에서 진부함이나 구태의연함이 일면 미덕이 될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 취향을 거스른 독성이 일으킨 신물은 참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결국, 계획된 마감일을 따라 나는 들호박을 넘겼다. 나의 들호박은 쑹덩쑹덩 썰려 그들의 큰 솥에서 끓여질 것이다. 혹시 들호박의 독성 때문에 그들의 책이 먹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슬쩍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아침에 나는 기도했다.
“주여, 혹시라도 저의 들호박 때문에 제자들이 탈이 나지 않도록, 편집자나 교열자의 손에 들린 가루로 모든 독성이 사라지게 하시고, 이번에 참여한 큐티 책이 제자들로 먹고 힘을 내게 하는 좋은 국이 되게 하소서!”
종말의 시대인 한 흉년은 지속된다. 제자들을 위한 국은 오늘도 도처에서 끓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 얼마간의 재료(비록 들호박이라 해도)를 담당해왔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구나! 키리에 엘레이손!
#Jun. 29. 2024.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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