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정원사 챈스의 외출

창고지기들 2021. 9. 25. 11:09

 

 

 

 

저지 코진스키의 소설, <정원사 챈스의 외출>을 읽고.

 


주인공의 이름은 챈스(Chance)다.

챈스라는 단어에는 기회, 우연, 가능성, 위험, 가망이라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기회’와 ‘우연’은 챈스의 대표적인 뜻인데, 내게 그들은 각별하다. 

각각 ‘은혜’와 ‘섭리’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은혜는 (구원의)기회를 선물 받는 것이고, 

섭리는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암튼, 챈스는 이름이 전부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저 그곳에 존재(소설의 원제는 ‘Being There’이다)하던 중, 

우연의 연속으로 얻은 기회 속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말과 행동을 하는 순진무구한(백치) 인물이 챈스인 것이다.

 


그 이름(멜기세덱)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브리서 7:2-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아이디나 이력)도 없다는 점에서 챈스는 

멜기세덱을 떠올리게 한다. 

멜기세덱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챈스가 안착한 곳은 

태초의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정원사 일을 하면서 자란 챈스는 

대형 스크린, 빈 캔버스, 깨끗한 오선지, 새하얀 백지와 같은 존재다. 

주체가 되어 자신을 주장하는 대신에 타자에 의해 비춰지고, 

그려지고, 작곡되고, 쓰이는 대로 규정되는 인물이다. 

이와 같은 챈스의 특징은 그리스도 역시 떠올리게 한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그리스도가 말이다.

 


예수께서 빌리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3-15)


그 누구도 챈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믿지 않았다. 

챈스는 본인을 정원사라고 소개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챈스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곧 정원과 그것의 생리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자들은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것을 은유로 여기고는 나름대로의 번역기를 돌려 이해했다. 


정원사 챈스의 이야기는 자연의 이치를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어떻게 번역하든 상식과 정도에 어긋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챈스는 떠오르는 차세대 현자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별히 경제 관련 사람들과의 인연 때문에 

챈스는 사업가, 경제 전문가, 혹은 경제 관련 대통령 자문 위원이나 

특급 비밀 요원 중의 하나라는 오해를 받았다.

 


챈스는 카메라 플래시가 토하는 눈부신 불길 속을, 구름 속을 빠져나오듯 빠져나왔다. 

그가 정원 밖에서 본 모든 것들의 이미지가 희미해져갔다. 

챈스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촌시 가디너(사람들은 그의 이름마저 챈스가 아닌 촌시, 

가드너가 아닌 가디너로 오해했다!)의 시든 이미지를 보았다. 

고여 있는 빗물 웅덩이에 던져 넣은 막대기가 그 이미지를 부쉈다. 

그 자신의 이미지도 사라졌다. 

-본서 중에서

 

 


이윽고 독서를 마쳤을 때, 나와 챈스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물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해?”


“정원사.”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 밖은 위험하다. 

권력을 손에 쥔 수많은 주체들이 힘없는 나의 멱살을 잡고는 

멋대로 규정하고, 번역하고, 해석하면서 대상화시키는 까닭이다. 

그들의 손을 타다보면 본연의 자신을 잃기 마련이다. 

존재는 뜯어내 버리고 이미지만 소비하다가 폐기해버리는 잔인한 대중의 서식처는 위험하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촌시 가디너가 아닌 가드너(정원사) 챈스가 거기에 있다. 

그곳은 화려하고 말끔하고 시끄러운 파티장이 아니다. 

희미하고 축축하고 고요한 정원이다. 

그곳에서 마음에 평화를 흠뻑 채우고 있는 챈스. 

그 옆에 내가 있다. 

윤이 나는 달빛 아래서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붙잡고 연주한다. 

바스락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내가 거기에 있다.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의 내가 거기에 있다.

 

 




#Sep. 25. 2021.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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