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우연과 필연

창고지기들 2015. 4. 29. 17:26

 

 

 

 

 

자크 모노의 책, 『우연과 필연』을 읽고.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열왕기상 4:32-33)

 


그는 이륜마차를 타고 천지사방을 종횡무진 달렸다.

두 개의 바퀴는 인문학과 자연 과학이었다.

광활한 지식의 들판을 달리면서 그는 상상력을 도구로

각종 지식들을 연결하고 조합하고 편집했다.

그 결과 수많은 지혜들이 창조되었다.

지혜가 정밀해질수록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입소문을 타고 천하의 모든 왕들이

그의 작품을 얻으려고 앞 다투어 사람을 보냈다.

지혜의 장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열왕기상 4:34)

 


어찌하다보니 내게도 솔로몬 증후군이 생겼다.

겁도 없이 미지의 지식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낯선 곳을 헤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뢰한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짝 긴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나 생경한 단어와 어색한 구문과 낯선 문장과

아리송한 문법 속에서 긴장은

이방인을 쉽사리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

바보가 되는 일이 유쾌할 리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만 있다면,

오래된 익숙한 지식을 낯설고 새롭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 증후군은 축복이다.

지적 허영심이라는 앙칼진 가시를 발라내야 하는

피곤한 수고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생물학자인 자크 모노는

그의 책 『우연과 필연』에서 기존의 철학과 종교를

과학이라는 잣대로 검열하고, 판단한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기존의 철학과 종교는

물활론적 속성과 어설픈(!) 인간중심주의로 뒤범벅된

하자품들일 뿐이다.

저자는 하자더미들 위에 발을 딛고 서서

새로운 철학과 종교를 주창한다.

과학 철학과 종교가 그것이다.

즉, 과학을 문명과 물질의 풍요로움을 위해 이용만 하지 말고,

그것에 철저히 헌신, 봉사, 희생하면서 섬기라는 것이다.

과학을 섬긴다는 것은 불안을 해소해주는

기존의 물활론적인 사유들과 결별하고,

과학이 주는 지독한 불안과 외로움(인간은 우연적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을 견디면서

과학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을 섬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참된 지식으로서의 과학을 탄생시키는 객관성의 공리는

윤리적 선택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결정인 윤리적 선택에 근거한

과학이야 말로 완전한 인간중심의 철학이자, 종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슬쩍 디스하고 있는

발생학적 인식론자 피아제의 인지발달 단계 이론에 따르면,

물환론적 사고와 자기중심성은 전조작기 인지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현 인류의 상태가 전조작기에 머물러 있음으로,

구체적 조작기를 거쳐, 형식적 조작기로

진화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구체적, 형식적 조작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추상적, 보편적,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자연 선택은 우연이 배제된 엄격한 요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저자는 자연 선택을 예측하여 그것에 상응하는

과학철학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언어는 크게 두 가지다.

책의 주소재가 과학과 철학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학교(지식, 정보, 설명)의 언어가 대세다.

그런데 마지막 장인 ‘왕국과 어둠의 나락’에 이르면

언어가 갑자기 변신을 한다.

돌연변이처럼 출현한 정치의 언어가

독자를 대상으로 과학에의 헌신을 요청하며 설득하는 것이다.

이 때 저자는 문학적 메타포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논리와 맞물리면서 일으키는 비장미는

자못 감동스럽기 까지 하다.

마지막 장이 과학자의 진화론적 선포,

그러니까 ‘과학적 케리그마’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 책은 독특한 과학책으로 기억될 듯싶다.

 


분자 생물학자답게 저자는

단백질 분자에 대한 설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즉, 저자는 미시세계 소속인 분자의 형성과 구조를

진화론과 그것의 핵심인 우연성으로 설명한다.

그 후 그는 미시세계의 분자들을 설명하는 논리를

확장시켜 거시세계 까지 설명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것은

미시세계를 설명하는 데는 그럴 듯 했던 논리가

거시세계를 상대할 때면 조약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거시세계에 대한 분자 생물학자의 설명은

마치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쩌면 그것은 앵글 탓일 지도 모른다.

아이레벨 앵글로 보는 나이로비 다운타운과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실제로 보이지만, 후자는 미니어처로 보인다.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봐야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앵글을 골라낼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시세계를 잘 보여주는 앵글로

거시세계 까지 보려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객관적 공리로 만들어진(!) 과학에도

다양한 번역과 다양한 언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특별히 거시세계를 진화론으로 설명할 때,

저자는 결과론에 손을 대고 있다.

결과론은 현재의 결과는 원인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위에 구축된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다.

결과가 원인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는 타당하나,

결과를 토대로 원인을 얼마든지

가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위험하다.

그래서 저자의 거시세계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들을 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가 헛갈릴 때가 있었다.

당신의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면박을 한다면야

당할 도리 밖에 없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얻은 유익들 중 하나는

신학과 과학의 차이를 확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학은 과학과는 달리 지식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진리를 상대한다.

인격으로서의 진리는 지식과 사실을 포용하기는 하나,

그것을 넘어선다.

그래서 그것은 학술지의 논문이기 보다는 차라리 문학이다.

신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성경이

이야기, 시, 노래, 편지, 묵시로 가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저자의 책에서 신학은 쓸모없을 넘어서서

몹시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소각 대상으로

분류되어 쓰레기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의 거시세계는 쓰레기 더미다.

미시 세계의 저자가 질색을 하는 쓰레기 속에서

나는 일용할 양식을 찾아서 먹고 산다.

그래도 어쩐일인지 나는 저자가 부럽지 않다.

 

 
저 보편적인 이론(생명권의 구조와 진화)에 의할 때,

지금 이 자갈돌은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연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할 수도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이유(의무)는 없고

단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권리)만을 갖고 있다는

이 사실이 돌멩이의 경우라면 충분하겠지만,

우리 자신의 경우라면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기를,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우리의 존재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기를 원한다.

모든 종교와 거의 대부분의 철학, 심지어 과학의 일부까지도

자기 자신의 우연성을 필사적으로 부인하려는

인간의 지칠 줄 모르는 영웅적 노력의 증거다.

-『우연과 필연』 중에서

 


안타깝게도 ‘예정론 강박증’을 앓고 있는 자들이 있다.

자신의 구원은 이미 영원 전부터 예정된

필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목을 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불안하게 하는 것일까?

혹시 구원을 베푸시는 이를 믿지 못해서

예정론이라는 교리에 목을 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예정론에 대한 강박은

기어이 불안을 실현시키고야 말 것이다.

구원은 교리가 아니라

구원자를 믿어야 받을 수 있는 은혜이니 말이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우연이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구원이 예정된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사건이면 또 어떤가?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니,

나의 존재와 구원은 보편이 아니라 기적으로 분류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은 창조주와 구원자의 가늠할 수 없는

은혜를 선명히 드러내 줄 것이다.

없어도 될 나를 굳이 만들고,

주지 않아도 될 구원을 굳이 주시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신 창조주와 구원자 앞에서

나는 감격하며, 감사한다.

이렇듯 존재와 구원의 우연성은 그것의 주도권이

내가 아니라 창조주와 구원자에게 있음을 확실히 해준다.

그런데 우연성은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서

무질서해지고, 퇴색해 간다.

즉,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우연은 필연이 되는 것이다.

예정론은 구원의 시작이나 중간 과정이 아니라

마무리 단계에 점하는 것이다.

우연한 내 존재와 구원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필연적이 되면서 예정론은 비로소 오롯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생의 말미에서 처음을 바라볼 때 출현하는 예정론은

교리라기보다는 고백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역자의 번역과 친절한 각주가 특별히 좋았다.

덕분에 나 같은 문외한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역자의 말에 나타난

그의 학자적 겸손함과 정직함은 인상적이었다.

학자로서의 그의 길이

그분의 은혜로 둘러지길 소원하면서 마친다.

 

 


#Apr. 17. 201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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