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아메리의 책, 『늙어감에 대하여』를 읽고.
케냐인들 사이에서
나의 사회적 자아(me)는 ‘동양 여자’다.
나는 그들 중에 거류하는 외국인이다.
‘동양 여자’의 나이를 궁금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이를 잊고 살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또 있을까?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뭇 다르다.
그곳에서 나의 ME는 ‘중년 여자’다.
나이에 따라 분류된 ‘중년 여자’는 종종 나이 값을 강요당한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중년 여자’는 당황스러웠다.
잊고 살았던 나이를 걸핏하면 들먹이는
고국의 사회적 문화적 태도가 그랬고,
중년이라는 나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자신이 그랬다.
그런 그녀에게 장 아메리가 말했다.
‘물질의 생산과 성장만 요구하고 재촉하는 시대 분위기 탓에
오로지 젊은이만 일하고 놀 수 있다는 식의
말하자면 아이돌 숭배가 한국 사회의 지배적 흐름으로
자리 잡아서 그런 거야.’
그리고 계속해서 늙어감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첫 번째로 젊은이는 공간의 존재이지만, 노인은 시간의 존재다.
젊은이들은 눈에 보이는 공간을 채울
사물과 물질과 도구를 열망한다.
그래서 시간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성취한다.
그러나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서
자신의 무의미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성찰한다.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목소리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을 느꼈다.
그런 식으로 읽을 거라면 집어치우라는
저자(무신론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에
한동안 귀를 문질러야 했다.
두 번째는 몸과 관련한 것이다.
젊은이의 경우에는 몸이 그를 섬긴다.
설사 그가 몸을 혹사시킨다 해도 몸은 젊은이의 뜻대로 순종한다.
그러나 노인의 경우, 몸은 오히려 섬김을 받는다.
노인의 몸은 삐걱거리고, 망가지고,
걸핏하면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따라주지 못하는 노인들은
자연스럽게 몸에 집착하다가 몸 자체가 되고 만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몸의 건강’과 관련된 소재들이 대화를 장악하곤 한다.
확실히 나는 늙어가는 중이다.
세 번째로 노인은 실존적 죽음을 먼저 경험한다.
사회는 노인들의 연령을 정해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박탈해버린다.
변화와 성장이 없다는 것은 생명력이 다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노인은 먼저 실존적으로 죽는다.
네 번째로 노인은 문화적 이방인이다.
실존주의가 지배하던 세상을 살았던 자에게
구조주의의 세상은 이해하기 벅차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았던 자에게
디지털 방식은 낯설고 따라가기 어렵다.
빠르게 변하는 문화 속에서 노인은 이방인이다.
혹 발 빠르게 문화에 편승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선심 쓰듯 주어지는 유행에 민감하다는 평가를 받을 뿐,
노인은 결코 문화의 중심인 젊은이들 속에 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죽음은 ‘없음’이다.
공간에서 사라짐이다.
있음이 없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나이를 먹는 일이다.
없음이 될 있음에게는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없다.
이와 같은 저자의 이야기들 중에 흥미롭게 다가온 것들이 있었다.
자신의 본래적 자아라고 고집하며 늙어 쇠약해지는 나를
한사코 부정하려는 젊은 시절의 자아는,
많은 경우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자아를 떠올리며 노란 반점이나 치통을 앓는 나를
낯설고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그러니까 일종의 환상일 뿐이다.
-열다섯의 나는 죽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시절의 나를 본래적 자아라고 고집한다면
지금의 나는 끔찍할 뿐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사라진 열다섯의 나는 본래적 자아가 아니다.
오늘, 지금의 내가 존재할 뿐이다.
흰머리가 늘어나고, 주름지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육신을 가진 지금의 내가 실존할 뿐이다.
그렇게 나는 본래적 자아라고 믿었던
젊은 육신의 환상을 깨뜨리면서
매일 늙어가는 내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환멸을 가져오는 영성을 위해
계속해서 묵상에 박차를 가할 일이다.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문화생활이란 사실 가능하지 않다.
이미 쌓아둔 교양의 정도가 얼마나 크고 넓으냐에 따라
그 주인의 문화생활은 경직됨이라는 틀을 가진다...
정신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둔중하고 무거워지는 나머지
새로운 표시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정신이 더 둔중하고 무거워지기 전에,
그러니까 뭔가를 받아들일 여력과 여유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에,
다양한 문화생활을 할 일이다.
뜬금없이(?!) 붓글씨와 수묵화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피어나고 있는 요즘,
서둘러 그들 속에 몸을 담글 일이다.
책 전체를 통해서 저자는 늙어감에 대한
두 가지 태도인 체념과 저항을 모두 긍정했다.
그리고 이 역설들을 가지고 죽음을 응시하면서
철저히 늙어가라고 말했다.
늙는 게 서럽다고 엄살 부리거나 싸구려 위로를 구하지 말라는
매정한 그의 말에서 처연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오직 주체인 인간과 주체들이 만든 것만 존재하는
세속 도시에서 늙어가는 일의 막막함과 비참함에 숨이 막혔다.
그 때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구나! 하는 안도가 밀려들었다.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인 하나님 나라에는
세속 도시와는 달리 노인이나 여자나 아이가
차별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육신은
세속 도시에서도 살아가고 있기에
늙어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겸비해야할 덕목들 중 하나는
받는(receive) 것이다.
받는 것을 잘하는 그리스도인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를 받고, 십자가를 받고,
구원을 받고, 말씀을 받고, 교회를 받고,
성만찬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런데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며, 오히려 적극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주는 분을 인정하고,
주는 것을 받아들여 향유하겠다는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행동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
(디모데전서 4:4-5)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시간 안에서 늙어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늙어감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감사함으로 받지는 않는다.
창조주를 경외하는 자들만이 그렇게 한다.
늙어감을 감사함으로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늙어감을 거룩하게 한다.
그것을 은혜로 여기고, 향유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늙어간다는 것은
힘과 능력이 빠져서 노력하지 않아도
“I'm nothing!"을 고백할 만큼
겸손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요,
자연스럽게 변방과 주변에 점하게 되어
차분히 관망할 수 있다는 것이요,
주름 사이사이에 지혜와 통찰을 지니고 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늙어감은 창조의 재료가 된다.
젊은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깊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창조하는데
늙어감은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한 때 ‘한스 차임 마이어’였던 장 아메리는
66살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더 늙어갈 기회를 스스로 박탈했던 것이다.
문득 책을 장악하고 있던 냉정함은
어쩌면 늙어감에 대한 저자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면 화 낼 것을 알기에,
나는 무표정하게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코끝이 시큼해졌다.
#Apr. 5. 201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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