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 마리에의 책,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을 읽고.
대륙을 넘는 이사를 두 번했다.
한반도에서 북미로, 그리고 북미에서 아프리카로.
대륙들을 떠날 때마다 마음고생을 반복해야 했다.
손 때 묻은 세간을 모조리 버려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사연과 추억이 서려있는, 차라리 가족이었다.
정든 이들을 떼어놓고 떠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그립다.
아프게 전부 버려야 했던 기억들 때문인지
정리는 자연스럽게 관심사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내게 있어서 정리는 공간에 질서를 들이고,
질서에 조화를 더해 물건들을 정갈하게 배치하는 것이자,
물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것은 창조와 일맥상통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보기에 심히 좋게’ 하는 정리는
힘은 들어도 기쁜 일이다.
정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정리 분야’에도 전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곤도 마리에의 책,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을 읽었다.
요약을 하자면 이 책은
‘정리를 통한 자기 계발서’라고 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정리’에 국한된 지식과 유용한 팁을
주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리를 통해서 인생 전체를
계발하고 발전시켜 나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정리란 사람과 물건과 집의 균형을 잡는 행위다.
이 때 균형을 잡는 주체는 사람이다.
사람은 두 가지 행위를 통해 ‘정리’를 할 수 있다.
버리기와 남은 물건의 자리 정해주기다.
버리기는 물건 하나하나에 손을 대고
설레는지 여부에 따라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감각적인 설렘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저자는 버리기를 통해 과거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불안을 점검할 수 있으며,
자기 결단력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즉, ‘버리기’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결단으로 자신감 있게 미래를 맞이하게 하는
미덕이라는 것이다.
설렘이 잣대이기 때문에 남은 물건들은 온통 설레는 것들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남은 물건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진짜 취향, 진짜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을 토대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남은 물건들의 정리 원칙 또한 단순하다.
집의 구조와 환경에 따라 물건별로, 세워서,
그리고 주인과 물건을 한 곳에 정리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얻은 팁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수납용품은 정리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짐만 된다는 것이다.
수납용품은 정리 보다는 물건을 가능한 많이 쌓아두게 하는데
효과적인 제품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조언 덕분에 수납용품에
쏟아지던 관심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물건 주인과 물건을 한 곳에 모으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하진군의 물건이
산발적으로 분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어수선함을
유발시키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문제를 알게 되었으니 몸을 움직일 일이다.
세 번째는 가방은 사용 후 매일 안을 비우라는 것이다.
가방 속 물건들의 자리를 정해주지 못한 관계로
여전히 실천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꽤 좋은 팁으로 여겨진다.
조만간 가방 속 물건들의 주소가 정해질 듯하다.
유용한 조언과 팁들에도 불구하고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버리기의 기준인 ‘설렘’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당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정리를 할까?
결국 방이든 물건이든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정리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정리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물건을 버릴지, 남길지를 구분할 때도
‘물건을 갖고 있어서 행복한가’,
즉 ‘갖고 있어서 마음이 설레는가’를
기준으로 구분해야 한다...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으로 채워진
자신의 공간과 생활을 상상해 보자.
그것이 바로 자신이 누리고 싶은 이상적인 생활이 아닐까?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과감히 버리자.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저자의 말처럼 마음이 설레는 물건으로만
채워진 공간에서 생활하면 과연 행복할까?
설레는 음악으로만 선곡해서 구운 CD(아날로그하구나!)가
곧잘 물리는 것처럼 오히려 지루하지는 않을까?
혹은 설레는 것들만 추구하다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을 거부하는 완고한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소비의 그물망에 걸려
설레는 물건을 반복적으로 사들이는
파리 신세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설렘의 대상은 대부분 새로운 것이다.
오래된 것에도 설렘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익숙함이나 편안함이 주는
기분 좋은 안정감을 설렘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설레지 않는 물건들은
대부분 오래되었거나 유행이 지나버린 것들일 것이다.
그런데 설렘이라는 기준으로
그런 것들을 골라내어 버리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감각이 가장 중요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인간에게 감각과 감정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을 판단 근거로 삼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짓으로 보인다.
인간은 단순히 감각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知), 정(情), 의(意)의 통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각 보다는 지성을,
지성보다는 의지를 중요시하는 전통에서 자란 내게
‘설렘’이라는 감각적 기준은 마뜩찮아 보인다.
설레지 않아도, 불편하고 버리고 싶어도
끝까지 간직해야 할 것들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영양이 구워준 CD는 오래 들어도 물리지 않는다.
불편하고 설레지 않는 것들이
좋아하는 음악들 중간 중간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음악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설레지 않더라도 곁에 두고 관계하는 것이
편중에서 놓여지고, 편협에서 풀려나게 한다.
그렇게 어수선함 속에서 나는
좀 더 성장하고, 좀 더 자유로워진다.
조만간, 낯선 그녀의 음악을 들으면서
하진군의 물건들을 그의 방으로 옮겨주어야겠다.
#Mar. 28. 2015.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