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의 책,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를 읽고.
읽을 수가 없어서 퍽 아쉬웠었다.
번역된 책이 한 권도 없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번역서가 잇달아 출판되었다.
먼저 손에 쥔 책은 문학수첩에서 출판한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였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은
초반부터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읽는 내내 뒤통수를 문지르는 수고는 계속되었다.
계시와 은총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꽤 어렵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의례 낯설고, 불편하고,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흔히 배척당하고,
학대당하고, 이용당한다.
계시와 은총의 전달자였던 예언자들과 선지자들,
나아가 외국인들과 이방인들의 고난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년 넘게 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안에 상처가 수두룩한 이유이기도 하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이야기 속엔 계시와 은총이 가득하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모습으로 안락하게 통제된
미국 남부에 느닷없이 찾아온다.
철저한 다름과 반전을 장착하고 나타난 그들은
편리한 편견과 신앙으로 구축된 거짓 평화를
사정없이 흐트러뜨리고 짓밟는다.
일관된 소설의 전말 앞에서 나는
불편함 이상의 당혹감을 느낀다.
내 안에도 미국 남부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며,
환상이 깨지는 고통을 겪어본 터다.
환상을 깨뜨린 것은 밖에서 날아온 계시의 칼날이다.
부서진 파편들 속에서 환멸은 은총의 꽃으로 피어난다.
저자의 이야기에는 환상적인 은총(축복과 행운) 따위는 없다.
다만 환멸의 꽃만 썩 탐스러울 뿐이다.
저자는 그것으로 안일한 현실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갈긴다.
제 손도 몹시 아팠을 것이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며 푸념을 늘어놓던 할머니는
자칭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교묘한 술수로(!)
가족들을 쥐락펴락하려는 약아빠진 사람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악명 높은 살인자 미스핏을 요리하려 든다.
결과는 실패다.
「강」에서 해리는 자기 이름을 베벨이라고 속인다.
진짜 베벨은 세례 요한 놀이(?!)를 하며,
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던 목사다.
얼떨결에 그에게 침례를 받은 해리는 다음 날,
그리스도의 왕국을 찾기 위해서
홀로 깊은 강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
아이는 가짜 세례가 아니라 진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당신의 구하는 생명은 당신 자신의 것인지도 모른다」에서
노파는 외팔이 이방인 시프틀릿을 데릴사위로 들이려 한다.
시프틀릿의 신부는 몹시 모자란 여자였으나,
노파에게는 유일한 희망이다.
노파는 무보수로 데릴사위를 부릴 생각에 흐뭇하다.
그러나 신혼여행 도중에 시프틀릿은 신부를 식당에 유기한 후,
노파의 차와 돈을 가지고 훌쩍 떠나버린다.
「뜻밖의 재산」에서 루비는
엄마와 언니들과는 달리 현대적 여성임을 자부한다.
자부심의 근거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뜻밖의 임신을 한다.
그럴 리 없다며 애써 부정하면서 그녀는
뜻밖의 재산을 받고도 고작 망연자실할 뿐이다.
「성령이 깃든 사원」은 수녀원의 순결한 소녀들이다.
그들은 시장에서 선천성 기형인 괴인을 구경한다.
천막에서 괴인은 자신을 기형으로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두가 하느님의 사원이라고 설교(?)한다.
며칠 뒤 목사들의 신고로 천막은 폐쇄된다.
「검둥이 인형」의 할아버지와 손자는
검둥이 이방인을 경멸하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다.
사이가 좋지 않던 그들은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은 뒤,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고통을 경험한다.
아픔 속에서 그들은 버려진 낡은 검둥이 인형을 함께 바라본다.
갈라터진 배신의 상처에 실낱같은 구원이 들어오는 것은 그 때다.
「불속의 원」의 코프 부인은 자기 농장에 불이 날까 전전긍긍한다.
건기를 지나고 있는 탓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세 소년은 부인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의 신경을 건드린다.
그들은 농장과 근처의 숲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던
부인을 뜻을 따라 그곳을 떠난다. 슬쩍 불을 낸 뒤에.
「선한 시골 사람들」의 헐가는 무신론자이자 철학 박사다.
스스로 개명한 그녀는 주체라는 자의식이 강하다.
어느 날 등장한 뜨내기 성경 판매원 청년은
그녀에게 한낱 선한 시골 사람일 뿐이다.
그녀는 그를 농락하려 든다.
그러나 정작 농락을 당하는 쪽은 그녀다.
「망명자」는 폴란드에서 온 귀자크씨다.
처음에 매킨타이어 부인은
농장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그를 즐거워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지 않는 망명자를
해고하지 못해 몸살을 앓는다.
갑작스런 사고로 망명자가 죽자,
그토록 지키려고 애썼던 농장은 삽시간에 파산한다.
결국, 건강을 잃은 매킨타이어 부인은
듣기 싫어하던 카톨릭 교리를 듣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말해주는 전통에서 자라난 탓에
보여주는 글을 읽는 것이 쉽지는 않다.
애니 딜라드의 책이 고달팠던 까닭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보여주는 이야기꾼이다.
책 읽기가 썩 용이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당연했다.
그런데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자
배경과 인물들이 디테일하게 살아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보는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재밌는 상상을 해봤다.
‘만약 신학교에서 그녀의 책을 읽힌다면 어떨까?’ 하는. ㅋ
#May. 23. 201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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