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세계관은 이야기다

창고지기들 2015. 6. 10. 16:53

 

 

 

 

 

마이클 고힌 · 크레이그 바르톨뮤의 책, 「세계관은 이야기다」를 읽고.

 


칸트가 낳고 딜타이가 키운 ‘세계관’은 자연산이다.

그것은 타고난 인간의 자율적 이성을 베이스로(칸트)

주어진 역사적 요인들을 섞은 산물(딜타이)이다.

그에 비하면 ‘기독교 세계관’은 양식으로 길러진다.

의도적인 교육과 훈련(회중예배와 개인묵상; 말씀과 기도)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산 ‘세계관’의 교정(矯正)

혹은 보정(補正)으로써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시종일관 언급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신학(神學)’ 혹은 ‘믿음’으로 치환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굳이 ‘세계관’을 주장하고 고수한다.

이유는 분명하고도 퍽 갸륵하다.

세계관으로 현대 서구 사상들과의 접촉점을 모색함으로써

선교와 목회를 돕기 위해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내겐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라는 포장에 있다.

그래서 내용적으로는

여타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서구 지성사를 정리한 부분(5, 6, 7장)은 읽기에 깔끔했으며,

9장 ‘몇 가지 공적인 삶의 영역을 보는 관점’과

에필로그인 ‘목회적 후기’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저자들의 저릿한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내겐 너무나 인간적(!)인 저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원론을 비판하면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둘로 나누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이원론으로 구성된 세상에서 나고 자란 탓에

이원론적 세계관의 물이 덜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세계관이

오즈의 마법사라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었다.

책에서 그것은 공동체와 개인에게 각각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는데,

공동체에게는 호랑이처럼 포효했으나

개인에게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꽁무니를 뺐다.

기독교 세계관이 나와 같은 변방의 아줌마선교사 보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증이었다.

(왕년엔 나도 (주지주의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열광했었다는.) 

 

 
독서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아이러니하게도 책 안이 아니라 책 밖으로부터 주어졌다.

책 속의 하나님은 여전히 생명과 빛을 창조하시는

선하신 분일뿐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케냐에서 만난 하나님은

죽이시고, 어둠을 창조하시며, 악을 허용하시는 분이다.

신학의 지반을 갈아엎어

새롭게 땅을 돋우어야 할 시점에서 읽었던 터라

책의 이야기가 경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독서 초반에는 저자들과

격렬하게 논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찢겨져 벌어진 신학을 봉합할 수 있는

바늘과 실을 갑작스레 손에 쥐게 되었다.

은혜였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하나님은 선을 디폴트로 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온전하신 분이자,

모든 것을 마침내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분이 선과 빛과 생명을 악과 어둠과 죽음과 함께

버무리시는 이유는 당신의 온전하심 같이

세상과 인간 그리고 나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다.

선과 빛과 생명은 악과 어둠과 죽음을 통과할 때

비로소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그분의 온전케 하심의 절정을 보여준다.

온전하시고, 동시에 온전케 하시는 분께

두려운 감정이 고여 든다.

선하시고 인자하시기만 하셨던 과거의 그분에게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마음이 생긴 것이다.

이제야 구약 성경이 외치던 말,

“주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라!”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되어야 할 모습은

증언이라는 단어로 훨씬 더 잘 표현되며,

증언은 우리의 삶과 말과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세계관은 이야기다」 중에서

 


치타는 달리고, 새는 날며, 물고기는 헤엄친다.

증언하기 위해서 그렇게 산다.

그리고 나는 쓴다.

그분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엮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힘들게 계속 쓰는 이유는 하나다.

다른 피조물 형제들처럼 나도 증인이기 때문이다.

 

 

 

#Jun. 7. 201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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