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시편의 기도

창고지기들 2015. 6. 28. 20:18

 

 

 

 

월터 브루그만의 책, 「시편의 기도(Praying the Psalms)」를 읽고.

 


땅에 뿌리를 내리는데 필요한 것은

햇빛과 비 뿐만은 아니었다.

어떤 작물들은 지지대와 한데 묶이지 않고서는

올곧게 자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작물이었다.

그래서 농부께 말했다.

“지지대가 필요합니다.”

월터 브루그만의 책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시편은 어떤 진공상태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고 사는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끝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롭게 새로운 시작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역사적 현장에서 사용된다.

-「시편의 기도」 중에서

 


단단한 언어와 쫄깃한 내용.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무게.

어느새 흠모의 대상이 된 저자는

교회의 구약 신학자이자, 세상을 향한 선지자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교회의 시편을 통한 기도를 돕기 위해

진지한 모색을 하고 있다.

 


현대의 크리스천들이 시편으로 기도하기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다.

언어적 특수성과 유대적인 어색함.

저자는 이것들을 이해할 때, 시편을 선별적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아예 무시하는 잘못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저자는 언어를 정보의 언어(지시, 한정, 묘사, 안정)와

문학의 언어(관계, 상상, 창조, 혁명)로 나눈다.

시편의 언어는 후자에 해당한다.

즉, 시편은 보고서(신학을 위한)가 아니라 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을 상대할 때는 문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은유는 보이는 실재에 뿌리를 둔 구체적인 언어이지만,

여전히 엄청나게 유연하기에,

모든 종류의 경험과 접촉을 하기 위해,

그 구체적인 대상물을 넘어 멀리 뻗어 확대함에 있어서,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한다.

은유의 의미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상상으로부터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기도자의 일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 은유를 충분히 조사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시편의 기도」 중에서

 


기도자는 시편의 거대한 은유들 속으로

겹쳐 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언어적 상상력, 곧 묵상이다.

즉, 시편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와

기도하는 사람의 리빙 텍스트 사이에 다리를 놓을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다리를 놓는 작업을 묵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묵상의 핵심은 언어적 상상력이다.

그것을 통해서 기도자는 무능한 환경에서 완전한 평강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혁명과 창조를 경험할 수 있다.

결국, 고착된 텍스트와 꿈틀거리는 경험 사이의

조화롭고 신속한 상호작용이 시편으로 기도하기다.

 


시편의 장애물들 중 다른 하나는 유대적 어색함이다.

이 부분을 다룬 4장 〈“유대인 영토”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주목할 만했다.

일전에 읽었던 같은 주제를 다룬

유진 피터슨의 책, 「응답하는 기도」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구약 신학자답게 저자는 유대인의 시편을

크리스천들에게로 입양시키려고 애를 썼다.

 

 

만약 시편을

평범하고도 특이한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시로 이해한다면,

그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진실한 경건과

참된 믿음을 갖도록 도울 것이다.

-「시편의 기도」 중에서

 


현대 크리스천들은 시편을 읽고 사용하는데

종종 어색함과 어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대인의 역사 안에서 태어난 노래이자,

기도이자, 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유대인을 위해,

유대인과 함께, 유대인으로서 시편을 통해 기도하라고 조언한다.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만드는 것은

시온을 향한 식지 않는 열정이자, 희망을 멈추지 않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믿음을 가지고 오래도록 심오하고 구체적인 소망과의

결속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과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들이 불확실성과 불안정과 위험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온 것처럼 기도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유대인으로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을 믿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은 열정적인 책이다!)

 


특별히 저자는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동시에

크리스천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원수 갚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원수 갚기를 갈망하는 피조물이다.

따라서 이 가혹한 시편은 우리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우리의 분노와 의분은 온전히 소유되고 온전히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면(오직 그 때에) 우리의 분노와 의분은

하나님의 긍휼에 양도되어질 수 있다.

시편을 통해 이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걷는다.

더 값싸고 더 쉽고,

더 “교화된”(enlightened) 길은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시편의 기도」 중에서

 


원수 갚음을 테마로 하는 시편들은

하나님께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고백한 후,

그것을 하나님께 양도함으로써 마무리 한다.

복수의 주어를 하나님께 양도할 때,

억울한 자는 비로소 복수심이라는 억압으로부터 풀려나

자유와 해방을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담임 목사로 삼아버린

유진 피터슨의 「응답하는 기도」를 읽은 지 5년이다.

독서 후 의기양양하게 시편으로 기도하기에 돌입했었는데,

곧 흐지부지되었다.

성경묵상으로 햇빛과 비는 공급받는 일은 일상이 되었으나,

지지대를 세우고, 그것에 엮이는 일은 여전히 묘연하기만 하다.

그래서 마음이 올곧지 못하고 방만한 것인 지도 모른다.

 


책을 통해 지지대가 세워졌다.

허나 그것에 엮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엮여보려고 애를 쓰는 게 맞다.

수지맞는 일임에 틀림없으니 말이다.

 

 

시(詩)의 순례는 진정 하나님- “그에게 어떤 비밀도

숨길 수 없다”-과 함께 하는 순례임을 발견케 될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이런 종류의 언어는 단조롭거나,

명백하거나, 쉽지 않다.

우리 경험의 어떤 것을

언어에 가져오는 일을 감당하도록 언어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말할 때,

우리는 주워진 선물과 또한 죽음에서 부활한 삶에 의해

놀라게 될 것이다.

-「시편의 기도」 중에서

 

 


#Jun. 27. 2015.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