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소탐대실(Anti-小貪大失)
소유냐? 존재냐?, 그것이 문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청춘의 시절은 햇살 아래 안개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그 후로 세상은 소유에 대한 노골적인 지지로 치달아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존재에 몰입해 있는 동안.
‘소유도 중요해!’에서 ‘소유만이 전부야!’로 진화한 사회의 관심은 온통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잃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나, 영악한 사회는 그것을 교묘하게 은폐한다. 덕분에 소유의 사람들, 곧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자들은 치명적인 소탐대실(小貪大失)을 경험하곤 한다. ‘치명적인’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은 그로 인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하는 까닭이다. 요한복음 18장과 19장에 등장하는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의 경우처럼.
먼저, 요한복음 18장의 대제사장들. 그들은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이방 로마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언뜻 보면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거룩한 행동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사실 그것은 소탐대실의 전형이다. 그들은 유월절 잔치를 먹는 사소한 율법을 지키려한 반면, 십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와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큰 계명을 어겼다. 무고한 하나님의 아들을 거짓 증언으로 고소하고,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도록 여론으로 압박하고 정치적으로 협박함으로써. 결국 그들은 작은 율법은 지키고 큰 계명은 어기는 소탐대실한 불경한 자들일 뿐이었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19장의 빌라도. 처음에 그는 시답잖은 일이라고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넘겨준 이가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를 처형하는 일만은 어떻게든 피하고자 진땀을 뺐다. 갈수록 대제사장들의 압박과 협박은 생각보다 매서워졌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지금까지의 방식에 길들여진 관계로, 그는 결국 무고한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고 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빌라도는 자신만의 공의를 수행한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십자가에 붙이는 것이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는 대제사장들의 압박에 맞서서 무슨 정의를 집행하는 것처럼 '내가 쓸 것을 썼다'(요한복음 19:22)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팻말의 문구 정도의 정의를 집행한 빌라도는 정작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끝까지 저항하지 못한 소탐대실한 불의한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합력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십자가형을 언도 받기 전, 하나님의 아들은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요한복음 19:11)고 빌라도에게 말씀하셨다. 빌라도의 죄가 큰데, 그에게 본인을 넘겨준 대제사장들의 죄는 더 크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했다고 정죄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점에서, 그들은 치명적인 소탐대실을 범했다. 작은 거룩과 의를 위해 커다란 불경과 불의를 선택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들이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인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점들 중 하나는 존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의 환경이 소유를 추구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고는 하나, 세상 속의 새로운 피조물 역시 소유의 문제로 존재가 흔들리고 몸져눕는 경우가 심심찮다. 특히나 지금처럼 직업이나 직분이나 수입이 전무한 경우에는 더욱.
며칠 전 한 사역자를 만났다. 대화를 통해서 영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쩔쩔매는 그녀의 궁핍함을 엿보았다. 분명한 사역의 포지션을 구하기보다, 묵상 모임을 짓고 시작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못지않게 나 역시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존재를 추구하는 방식으로써 지원받는 모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니. 소유에 집착하게 만드는 세상에 저항하는 방식으로써 연합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 교회인 우리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하지 않기 위하여, 즉 소유로 인하여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탐(大貪)을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는 소실(小失)을 선택하신 그리스도의 지혜로운 모범을 평생 따르기 위하여서는. 키리에 엘레이손!
#Mar. 8. 2025.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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