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욱 산문집, <일인용 책>을 읽고.
외식 목록에 추어탕이 추가되었다. 보신할 요량으로 가끔 찾는 추어탕 집에는 의례 어르신들로 북적거린다. 강황을 넣고 지은 노란색 쌀밥이 담긴 솥과 부글부글 끓는 추어탕이 담긴 뚝배기 앞에서 시린 몸뚱이들은 일용할 열기를 주입받는다. 계산하고 나오면 특별한 후식이 기다리고 있다. 뻥튀기. 손바닥만 한 뻥튀기를 양손에 들고 번갈아 가며 한 입씩 베어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욕심쟁이 어린애나 된 듯 기분은 가볍게 꼭짓점에 가닿는다.
어쩐 일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바로 그 뻥튀기를 떠올렸다. 아마도 한 편에 700자라는 분량이나 글의 소재와 내용이 양손에 들고 먹어도 부담 없고 담백해서 일터이다. 책 표지와 질감도 뻥튀기적이긴 하다.
하지만 사전적인 뜻과 상관없이, ‘열대야’라고 발음하면 엉뚱하게도 열대과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 이렇듯 후덥지근한 밤에서 아오리까지 건너오고 나면, ‘열대야’라는 말은 어쩐지 불쾌감을 청량감으로 둔갑시키는 마법의 단어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열치열,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 했던가. 나로서는 열대야의 무더위를 열대야의 밝고 환한 ‘어감’으로 다스리는 것이 요즘의 피서법이다. -본서 <열대야> 중에서
공식적인 지위와 이름을 빼앗겼지만, 명왕성은 여전히 명왕성으로서 태양계 행성의 일원이었을 시절보다 한층 더 마음을 건드린다. 명왕성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세계의 밝은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것, 버림받은 것, 외면된 것, 억압된 것들도, 어딘가에는 그 쓸쓸한 아름다움이 고이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로서 ‘명왕성스럽다’ 같은 조어가 쓰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건 듯 스쳐간다. -본서 <‘명왕성스러움’을 위하여> 중에서
고심 끝에 한때는 대명사를 써야 할 경우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그’로 통일시켜보려 한 적도 있다. ‘그녀’라는 단어가 성별을 표나게 강조하는 것과 달리 ‘그’라는 단어에는 딱히 남자라는 정보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 써보니 습관의 벽이 또 만만치 않음을 깨닫는다. ‘그녀’라고 할 때 여자라는 점이 너무 도드라지는 것과 반대로, ‘그’라고 하면 여자라는 점을 억압하는 것 같아 다시금 편치가 않다. 문맥이 확실히 받쳐주지 않는 경우 남자로 오해될 소지가 크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반대말로 ‘그남’이 있 않으니 말이다. 결국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나는 나의 여자들을 글 속에 등장시켜야 할 때 ‘그’와 ‘그녀’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삶과 언어의 간극을 이렇게 또한 절감한다. -본서 <그녀> 중에서
또래인 시인의 일상을 정당하게(!) 엿보고 엿듣는 일은 즐거웠다. 언어에 예민하고, 일상에 민감하고, 뜬금없는 연상과 엉뚱한 공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도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시인. 무너지고 부서진 말의 잔해를 찾아 하나하나 아교를 붙여 복원하고, 그 와중에 없어진 부분은 새롭게 창조도 하면서 시인은 일상의 더위를 극복하고, 밀려난 자들을 위로하고, 이웃을 지시하는 대명사 하나에도 신경을 쓰면서 사랑스럽게 살아간다.
글이라는 은막에 비친 시인은 P형이 분명해 보인다. J형인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는데, 우리가 친구였다면 아주 가끔 만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ㅋㅋㅋ
곧 졸업이다.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에 감정적 투사를 하는 것은 장래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행성 명왕성으로 불리든 소행성 134340으로 불리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히 존재할 뿐. 그렇게 전(前) 명왕성, 현(現) 소행성 134340과 함께 나는 물 위가 아니라 땅 위를 직립보행하는 기적을 오늘도 책임지고 누리려 한다. 충성! ㅎ~
#Jan. 25. 202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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