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그의 이야기를 묵독할 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들려주는 서사를 기반으로 머릿속에 구현해낸 세상과 등장인물은 자연스레 유럽적이었으나, 실제 그의 배경과 인물들에는 일본어 이름이 붙어서 인 듯하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한 창백한 남녀 주인공들이 일본어로 대화하면서 플롯을 이끌어가고 있는 하이브리드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는 나의 문화적, 문학적 소양이 딱 그 정도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자체는 커스텀 라떼처럼 입맛을 자로 잰 듯 재미있었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본서 중에서
이름에 색채가 없는 스쿠루는 이름에 색채(적, 청, 흑, 백)가 있는 친구들과 함께 총천연색 행복의 때를 누리다가 일순간에 퇴출당한다. 컬러를 빼앗긴 스쿠루는 한동안 죽음을 갈구하다가 문득 임한 은혜를 따라 만난 후배(회색)와 함께 천천히 회복의 단계를 밟아간다. 그러나 회색빛마저 말없이 페이드아웃 되고, 사라라는 여인을 만나기 전까지 회복은 정체기에 들어선다. 회복의 완성기는 사라의 권유를 따라 스쿠루가 색채들로부터 자신이 퇴출당한 이유를 추적하기 위해 순례를 떠나면서 다시 시작된다.
이름에 색채 대신에 제조(製造)를 담고 있는 스쿠루의 삶이 색채가 있는 자들과 다른 종류일 것은 뻔하다. 친구들과는 달리 드라마틱한 변화와 굴곡 없이,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묵묵히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인생의 부류에 스쿠루가 있다. 그런 스쿠루에게 순례는 실체적 진실에 대한 완전한 파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다만, 나름대로 이유를 추론하고, 그에 비춰 자기 생에 의미의 세례를 부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시와 억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처리할 수는 없다. 그 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대면해야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다. 지난한 과정을 통한 대면은 치유를, 해결의 실마리는 해방을 선사하면서 고난은 성장을 흔적으로 남긴다. 여성을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고, 여성으로 인하여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으나 또한 여성으로 인하여 치유와 회복의 안내를 받기도 하는 아이러니가 인생에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렇게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 무시와 혐오의 대상이자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인 미스터리가 누구에게나 있다. 주체로서 그와 같은 타자에게 두려움과 갈망을 느끼는 스쿠루는 결국 순례를 통해 성장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물려준 태그호이어가 가리키는 정확한 시간을 따라 사라의 결정도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일 테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Why?”를 연발하면서 탄식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왜냐고 따져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한 축복과 능력이 내게 주어졌으니, 나의 생은 매일이 순례인 셈이다. 일전에, 일종의 순례(?!)라고 할 수 있는 퍼스널 컬러 테스트를 통해 나의 퍼스널 컬러가 겨울 쿨톤 비비드임을 알게 되었다. 쨍한 알록달록 색을 칠하고, 입고, 배경으로 할 때 돋보인다는 말인데, 그 사실 앞에서 나는 일종의 통쾌함 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어렴풋한 추측만으로 자신을 재단하고 평가해왔던 것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밀려오는 것이 비단 환멸감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렇듯 삶이 순례의 여정이 될 때, 고통스러운 생에도 비로소 유쾌함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리라.
#Feb. 8. 202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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