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책, <탕부 하나님>을 읽고.
책은 정명(正名)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누가복음 15장 11-32장의 이야기는 흔히 둘째 아들과 아버지를 투톱 주인공으로 삼는 ‘탕자(둘째 아들)의 비유’라 불린다. 이에 대해 저자는 명백한 오독(誤讀)이라고 지적하고는, 그것에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것의 근거를 누가복음 15장 전체 맥락 속에서 찾아낸다.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세 개의 이야기’가 병풍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여인의 이야기 다음에 피날레로 등장하는 것이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다. 이들 시리즈는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는 자신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다. 이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잃어버린 두 아들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큰 아들의 역할이 맡겨진다.
큰 아들은 둘째 아들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부지런한 노력, 도덕성, 똑똑한 지식, 책임감과 성실함의 대명사인 큰 아들에 반해, 둘째는 게으르고, 무식하고, 허랑방탕하며, 쾌락적일 뿐만 아니라 패륜적이다. 그러나 큰 아들이나 둘째나 아버지를 멀리 떠났다는 점에서는 하등 차이가 없다. 둘째는 문자 그대로 마음과 몸이 멀리 떠났다면, 큰 아들의 경우는 몸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나 마음은 오히려 둘째보다 더 멀리 떠난 관계로 아예 돌아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는 게 다른 점이다.
형의 문제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이력을 내세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빚을 지운다. 그분과 그들을 통제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든다. 그의 영적 문제는 자아상의 근거를 성취와 행위에 두는 데서 비롯되는 지독한 정서 불안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떠받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흠잡아야 한다. 내 신학교 시적의 한 교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만든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은 선행”이다. …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 -본서 중에서
교회의 일꾼들은 대부분 큰 아들들이다. 큰 아들들의 특징을 갖추지 않고서는 중역을 맡을 수 없는 것이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의 현실이다. 나 역시 큰 아들이긴 마찬가지여서, 지독한 큰 아들 병에 감염된 적이 있었다. 기쁨을 잃어버린 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별히 선교사로 케냐와 우크라이나에서 숨을 쉬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대단한 헌신을 빌미로 그분이 번영과 형통의 복을 의무적으로 내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이런 억지 주장을 그분이 받아들일 리 없었고, 그로 인하여 나는 지독한 자기연민에 빠져 한동안 고생을 해야만 했다. 결국, 나는 나의 헌신이나 도덕률을 근거로 그분을 통제하려 했던 것이고, 그분에 대한 충성을 빌미로 그분을 이용하고, 그분을 나의 형통을 위한 도구로 취급했던 것이다. 오래 열심히 믿어온 자들에게 ‘큰 아들 병’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 것이다.
유일하게 변화된 삶을 결실하는 부류는 더 열심히 노력했거나 더 순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마 13:23) 사람들이다. …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더 잘 알아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여 사랑과 책임의 견고한 관계를 이루어야만 한다. 예수님을 본받고 섬기고 사랑하려 애쓰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당신은 그 분을 알아가고, 닮아 갈 수 있다. -본서 중에서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을 쉬지 았었던 덕분에, 결국 큰 아들 병은 적발되었다. 그리고 은혜 안에서 점차 치유되어 갔다. 그러나 큰 아들 바이러스는 항시 잠복 중이다. 은혜의 면역력이 떨어져 자기 의의 온도가 높아지게 되면, 큰 아들 병은 재발할 예정이다. 그래도 마냥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진정한 맏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아들, 곧 둘째 아들일 뿐만 아니라 큰 아들이기도 한 나를 지속적으로 찾아내어 탕부(아들을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는, 혹은 남김없이 다 써버리는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된 잔치에 늦지 않게 참여하기 위하여 나는 맏형의 손을 붙들고, 길 자체이신 맏형을 따라, 마침내 탕부의 집에 도착하기 까지 미리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걸어갈 것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Dec. 28.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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