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연의 책, <스타일, 인문학을 입다>를 읽고.
우리 가족들이 살아가고 있는 서식지는 후기 자본주의 소비 사회다. 서식지에 살며 적응하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소비자가 되었다. 우리의 소비는 쇼핑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실현된다. 남편은 책과 볼펜을, 딸은 패션 아이템을, 아들은 게임을 끊임없이 사들인다. 물론, 나 역시 게임은 빼고, 생활필수품은 더하여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들이기는 마찬가지다.
얼마 전, 겨울 방학을 맞은 딸아이(이젠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인!)가 한 달여 동안 집에 머물렀었다. 그간 못 다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 꺼리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패션이었다. 각자 알고 있는 패션에 관한 정보를 나누고, 서로의 스타일에 대해 평가(존중을 바탕으로 한)하면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친밀감을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우정이었다.
딸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학생시절 아방가르드(!) 했던 그녀의 스타일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사회적(!!)이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을 두루 갖추는 쪽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게다가 그녀는 패션을 가지고 즐겁게 놀 줄 아는 부류인데, 나는 그런 그녀가 기특한 동시에 부럽다.
패션과 스타일 면에서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그녀를 나는 따라잡을 수 없다. 후천적 필요에 의한 사색적인 접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형편이다. 그런 맥락 속에서 시간을 들여 읽은 것이 이 책이다. 작가는 퍼스널 스타일리스트인 이문연님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에 출판된 책인지라 트랜드 면에서는 확실히 뒤떨어진 감이 있다. 그러나 패션과 스타일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에 있어서는 여전히 동시대적이다.
결국 내면이든 외면이든 나의 정체성과 이상향과 조화가 관건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은 나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이상향에 맞게 내면과 외면을 서서히 맞춰나가면 된다. ... 나를 바로 규정할 수 있어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규정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 이렇듯 내면은 나로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기둥 같은 것이며, 외면은 나를 더욱 나답고 멋지게 보여주는 도구다. -본서 중에서
스타일은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매력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나다움이며, 나다움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다. 나다움이란 예쁘고 멋지게만 꾸며주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맞게 표현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건강한 자아상은 내면과 외면의 통합으로 이루진다. 내면과 외면은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면은 반드시 외면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외면 역시 내면에 영향을 미치고야 만다. 이 와중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들 사이의 주도권은 내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가끔씩 주도권을 외면에게 양도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정체성, 취향, 자존감, 그리고 지식과 태도와 의지가 스타일에 우선한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스타일로의 관감한 변화가 자존감이나 태도를 크게 북돋울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책을 통해 얻은 구체적인 유익은 다음과 같은 옷 쇼핑에 관한 것이다.
첫째, 집에 가지고 있는 옷 중에 평소 잘 입는 옷과 활용할 만한 옷들을 머릿속에 정리해놓아야 한다. ...
둘째 아이템을 입고 어디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상상한다. ...
셋째, 옷의 수명을 상상하라. ... 최소 2-3년은 버텨줄 아이템을 옷장을 채우라. -본서 중에서
스타일에서 사람이 주가 되어야지 옷이나 가방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몸에 걸치는 모든 아이템은 엄연히 사람을 빛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 스타일을 통해 빛나고 싶다면 내가 어떤 옷을 입을 때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어깨가 쫙 펴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본서 중에서
집에 안 입는 옷이 많다면 이런 소비적 우월감 때문에 혹은 순간적 충동으로 구매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자. 소비는 소비자의 특권이며 특히 옷 쇼핑은 소비의 꽃이다. 하지만 현명한 소비자가 현명한 소비를 하듯이 쇼핑의 진정한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소비만 하다 보면 쇼핑은 만개하지 못하고 시든 꽃으로 변해버려 옷 무더기만 남길 것이다. -본서 중에서
책장에 어떤 책이 꽂혀있는 지는 잘 알면서, 옷장에 어떤 옷들이 걸려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에너지를 들여 정기적으로 옷장을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손 놓고 지내다 보면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옷장은 패션 아이템 보관함이 아니라 게으름과 미련함을 집대성한 창고로 황폐해질 테니 말이다.
또한 책은 스타일을 위한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조언들을 해주고 있었다.
실루엣이 원래 체형 고유의 선이라면 핏과 비율은 내가 원하는 체형에 가까운 실루엣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비법이다. 실루엣과 비율, 핏은 체형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서 중에서
취향은 전체 컨셉과 개성을 결정한다. 이미지와 실루엣, 취향 이 가지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취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취향은 삶이 축적된 그 사람의 기호이자 주관적인 선호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 취향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심리학적 주장도 있다. ... 취향을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양한 형용사 중에서 좋아하는 단어를 선택해보는 것이다. 혹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열 가지 내외로 모아놓고 그 물건들에서 느껴지는 형용사를 세 가지씩 적어보는 방법도 있다. 가장 많이 나오는 형용사가 내 취향을 가리킬 확률이 높다.... 취향은 내가 드러내고 싶은 분위기이며,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이미지다. 그래서 취향이 곧 개성이자 내 스타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본서 중에서
흔히 ‘품질 좋은 옷’은 ‘비싸 보이는 옷’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품질 좋은 옷’이란 비싸지 않더라도 입을 가치가 있는 옷, 즉 너무 허름하거나 저렴해 보여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의 옷을 가리킨다. -본서 중에서
책을 통해서 작고하신 유명 패션디자이너가 입만 열면 왜 그렇게 영어 형용사를 남발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패션과 스타일은 이론의 여지없이 취향의 문제다. 그리고 취향은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표현되는 종류다. 왜냐하면 취향은 추구하는 이상향(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패션 디자이너나 스타일리스트가 강조하는 형용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대중을 선도하려는 그들의 취향을 함의하고 있는 까닭이다.
책의 안내를 따라 검사해본 나의 취향은 지적인, 편안한, 멋스러움이다. 이를 맞추기 위해서 나는 무엇보다도 작가가 지적한 대로 품질 좋은 옷을 구입할 필요가 있다. 이는 패션 아이템의 양을 크게 줄이고, 적지만 질 좋은 아이템을 구비하는 쪽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질보다 양인 소비 패턴을 바꾸는 일에도 자기 부정이 필요한 것이다.ㅋㅋ
이처럼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주도권을 내 쪽으로 끌어오는 과정이다. -본서 중에서
결국, 책에서 말하는 패션과 스타일링의 결론은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라!’다. 유행 따라 수동적으로 되는 대로 입지 말고, 주도권을 가지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선택해서 입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확장한다면, 입는 일에 있어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때, 먹는 것과 거주하는 것, 나아가 인생 전반의 일에도 주체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집순이인 내가 매일 즐겨 입는 옷은 스웨트셔츠, 파자마, 그리고 패딩 조끼다. 안정적인 삼각형 취향 저격을 위해서는 지적임, 편안함, 멋스러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적이고 멋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편안함만 남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편안함 일색의 스타일에서 누가 나를 구해낼꼬?" ㅋ~
#Feb. 11. 2023.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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