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선의 책, <나의 덴마크 선생님>을 읽고.
나에게는 선생님이 필요했다. 그저 선생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별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지리산을 뒤로하고 먼 북유럽으로 떠났다. -본서 중에서
선생님이 있을 리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라리 선생님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생의 목표인 자들에게는 늘 선생님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자가 부럽다. 그녀가 서른아홉의 나이에 진짜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으니 말이다.
호이스콜레의 교육 목적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삶에 걸친 계몽, 대중 교육, 민주주의 소양 교육. 덴마크가 19세기에 호이스콜레를 만들고 지금까지 세금을 투입해 학교를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국민이 무지에서 깨어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하는 것.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넘어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성숙함을 요구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끊임없는 재교육만이 민주적 질서로 작동하는 복지 제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게 덴마크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런 호이스콜레 모델을 세계적으로 펼쳐 낸 곳이 내가 다니고 있는 IPC다. -본서 중에서
책은 저자가 덴마크의 호이스콜레 중 하나인 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에 입학하여 보낸 일 년간의 여정을 꼼꼼히 회자하여 적은 것이다. 덴마크로 떠나기 전 저자는 지리산에 위치한 대안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저자는 선생님에 대한 필요를 강하게 느꼈고, 결국, 학생이 되기 위해 덴마크로 떠났다.
나는 이제라도 좀 놀아 보게 되어 다행이다. 조금 덜 진지해도 된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 긴장을 내려놓고 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봄 학기가 내게 준 선물이다. -본서 중에서
쿠르드족 친구들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고향의 폭격 소식 속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족과 친구들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가족들을 덴마크로 데려오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동전을 깜박 잊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 혼자 밥 먹는 사람에게 마음을 쏟는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불러서 요리를 해 먹이고, 주말 파티에서 예쁜 옷을 입고 춤을 춘다.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것이다. -본서 중에서
저자는 거트루드 선생님, 차 선생님, 클라우스 선생님 등 일군의 덴마크 선생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실한 학생이 된다. 학생으로서 저자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일 년의 과정 동안 섬김을 받는 존재에서 섬기는 존재로, 파티를 회피하던 인간에서 파티를 즐기는 인간으로 서서히 변화된다.
수업에 나오기로 한 약속을 번번이 지키지 못해서 학교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건 그 학생의 실패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비록 성인이지만 아직 어린 학생 혼자서 퇴학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도록 배려하고자 애쓴다. 너는 학교를 떠나야 하지만, 이것은 IPC라는 학교의 행정 절차에 따른 것일 뿐 결코 네 삶의 실패가 아니라고. -본서 중에서
옆에서 듣고 있던 소렌 선생님이 거들었다. “민주주의와 복지 제도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교육하는 일이 중요해. 우리가 신경 써서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거든. 요즘 자라나는 덴마크 아이들은 복지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가 스스로를 조직하고 싸워왔다는 걸 교육해야만 해.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지. 그 옛날 농부들이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했다면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이, 여성들이 나섰고, 지금은 이민자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어요. ” 선생님이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면 작은 모임이라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조직하고, 싸워라. -본서 중에서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삶의 수많은 패러독스와 아이러니를 받아들여 향유할 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성장과 성숙은 높은 수준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태는 삶에 대한 태도로 드러난다.
지금의 처지를 결과보다는 과정으로 여기는 태도, 그리하여 노력과 훈련을 끊임없이 삶에 들일 때 비로소 성장하고 성숙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고 무한한 성장을 주장하는 존 듀이(John Dewey)의 생장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과정 끝에는 반드시 최후의 결말이 있다고 여기는 쪽이다. 성장할 기회가 있는 지금은 은혜의 때다. 그러나 머지않아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때가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다.
언젠가 미술실에서 나무를 그리다가 온갖 공을 들였지만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순간이 왔다. 그때 나는 길을 잃은 것 같다고 캐트린에게 말했다. 그러자 캐트린은 나에게 질문했다. “길을 잃는 것을 싫어하니?” -본서 중에서
귀국한 뒤, 예배(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종교 생활)의 길을 잃었노라고 깊이 탄식하곤 했었다. 물론, 지금도 헤매기는 마찬가지나, 처음과 비교해볼 때, 불안과 초조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길 잃음을 느긋하게 인정하고 나자,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껏 걸어왔던 길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길 잃음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걸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길을 따라 걷는 대신에 걸으면서 길을 찾거나 혹은 내는 중이다. 수많은 길이 있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는 것이 무슨 대수이랴! 그러니 J인 나여, 길을 잃는 것을 P처럼 즐겨라. 그렇게 자기 부인을 이루라.
책을 덮은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도 선생님이라 부를 만한 이가 있었다. 당뇨약을 처방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만나는 내과 의사 선생님. 그는 나의 선생님이다. 혈당과 혈압과 콜레스트롤 등의 정확한 수치를 근거로 나의 탐식과 게으름과 무절제함을 지적하여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게 만드니 말이다. 나로 좀 더 건강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분. 다음에 병원을 찾게 되면,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며 깍듯하게 인사해야겠다.ㅋ
어쩌다 보니, 만학도가 되었다. 나이 오십 줄에 들어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전문 분야를 들여다보고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전문가다. 그런 점에서 교수님은 선생님과는 다르다. 선생님은 전문가라기보다는 먼저 태어나 인생을 경험했으나 여전히 좌충우돌 인생을 경험하고 있는 동료 선배에 가깝다. 그렇다면 교수님 역시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얘긴데, 머리가 굵어진 자들이 다니는 학교의 성격상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ㅋ
자기 경험을 담담히 풀어놓는 화자의 음성이 퍽 따뜻했다. 문장은 가식적이지 않았고, 여유와 착함이 묻어있었다. 그래서 읽는 내내 편안함이 느껴졌고, 읽은 후에는 저자를 축복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머리는 깨어 있는 의식으로 서늘하게, 마음은 인간애로 따뜻하게, 그리고 팔다리는 사랑의 수고로 촉촉하게, 존엄을 지키는 사람으로 내내 성숙하며 기뻐하시기를.
#Mar. 11. 2023.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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