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분별력

창고지기들 2023. 2. 25. 11:07

 

 

 

 


헨리 나우웬의 책, <분별력>을 읽고.

 


“어떤 이가 일행과 보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른 드러머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게 하라. 그 소리가 어떠하든, 또 얼마나 멀리에서 들리든.” -본서에서 여러 번 인용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


이 책은 애매모호하다. 헨리 나우웬이 쓴 것이 분명하지만, 헨리 나우웬이 지은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헨리 나우웬 사후(死後)에 그의 동료들이 ‘분별력’이라는 주제로 그의 살아생전 써놓았던 글들을 편집하여 출판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책은 온전한 헨리의 작품이 아니다. 편집하여 엮은 자들, 곧 헨리와 친밀히 교제했던 친구이자 동료들의 생각과 견해가 적극적으로 가미된 산물이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저자에게 있어서 분별력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능력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나우웬씨도 그의 동료들도 훈련(訓練)과 연습(練習)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에 의하면 훈련과 연습은 공통분모를 가진 서로 다른 분수다. 훈련은 특정한 존재가 되기 위한 과정이고, 연습은 특별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과정이다. 연습 없는 훈련은 없다. 그러나 훈련 없는 연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면,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반드시 피아노 연습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단순히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면, 꼭 피아니스트까지 될 필요가 없다. 요즘도 나는 가끔씩 피아노 연습을 한다. 이는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훈련이 아니다. 그저 챤양곡을 잘 치고 싶어서 피아노를 연습할 뿐이다. 


나우웬씨의 분별은 연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기 보다는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존재됨이다. 즉, 분별은 분별하는 자가 행하는 일상의 일이다. 이 때 분별하는 자가 되려면 분별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 이는 구체적인 분별의 행위, 곧 분별력을 기르는 연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주시기를 빕니다“(골1:9-10, NRSV) 사도 바울이 말한 ‘신령한 총명’은 분별하고 직감하고 통찰하여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보통 혼자 있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 일어나는 일들의 ‘상호연계성’을 간파하는 깊은 통찰로 열매를 맺는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시공간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을 수 있다. ... 분별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고서 현상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분별하는 자가 되기 위한 분별 훈련은 분별력을 기르는 연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책 <분별력>은 분별 연습을 위한 일종의 안내서다. 책에 의하면 분별의 연습은 개인과 공동체(교회)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책(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양서들)과 자연(하나님의 모국어)과 사람들(친밀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여)과 사건(사회, 정치, 자연, 경제, 역사, 문화 등 제반의 격변하는 상황들)을 모두 아우르면서 그들 간의 상호연계성 안에서 통합적인 통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분별의 대상은 소명(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임재(거룩한 기억), 정체성(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 진정한 자아), 때(행동할 때, 기다릴 때, 끌려갈 때)로 특정할 수 있다. 


독서를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그동안 성경 묵상의 분별 연습적 측면이다. 나의 묵상은 헨리 나우웬이 말하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 이상이다. 그것이 말씀과 내 삶의 전 영역(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 가족과 공동체, 사회·역사적 사건들, 소명, 정체성, 임재, 때, 심지어 꿈까지)을 연결시키는 까닭이다.

 

 

4세기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에게서 얻은 지혜가 있다. “악령과 직접 싸우지 말라.” 사막의 현자들은 악의 세력과 정면 대결하려면 영적으로 성숙해야 하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둠의 왕자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는 대신 빛의 주님에게 집중하고, 그리하여 간접적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어둠의 세력을 좌절시키라고 제자들에게 충고했다. -본서 중에서


과분한 관심을 너에게 주지 않겠다. 너, 검은 바다(사회, 정치, 경제, 역사) 속에서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리워야단이여! 저의 관심을 온통 사로잡으소서, 빛이신 주여!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소명과 귀향에 우리 같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 새들은 성 프란체스코에게, 나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강은 싯다르타에게, 별들은 토마스 머튼에게 말한다. 자연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생명의 성령과 가까워진다. 강과 나무, 새와 꽃은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과 인간의 아름다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본서 중에서


통속적으로 말하는 거주지의 입지 조건들 중 내게 유의미한 것은 두 개다. 역세권이냐? 숲세권이냐? 양쪽을 다 충족시키면 좋겠지만, 현실은 대략 가혹한 쪽이다. 귀국 후 겪은 빠른 세속화의 영향으로 역세권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도시를 숲처럼 누비며 묵상하는 도시심 속 묵상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출현한 것은 얼마 전이었다. 그것이 구차한 변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 도시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편리함에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나의 게으름은 스마트한 도시에 무릎을 꿇고 싶어 안달이다. 영성이 가난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괴롭더라도 답을 찾아야 한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남은 자들 중 하나가 되기 위해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 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장 바니에가 손에 대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상처 입은 새를 부드럽게 안아 들되, 마음껏 움직이고 언제든 날아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는 손을 이야기 했다. 장 바니에는 우리 주변에 두 개의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한 손은 말한다. “내가 널 안전하게 붙들고 있다. 너를 사랑하는 까닭이다. 나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다른 한 손은 말한다. “가라, 내 아이야. 가서 네 길을 찾아라. 실수하고 배우고 아파하고 성장해라. 그리하여 네가 되어야 할 사람이 되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자유다. 그리고 나는 늘 네 가까이에 있다.” 이 두 손은 조건 없는 사랑의 손이다. -본서 중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멀리 떠나게 될 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찾았다. “어디를 가든 어미의 두 손을 기억하렴.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자신이 되도록 기도하는 이 어미의 두 손을 반드시 기억하거라. 내 사랑하는 아들아.”

 

 

독서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얻은 사소한 깨달음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말의 기법을 제대로 이해할 때 오독(誤讀)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가령, ‘범죄한 사람은 하찮은 존재이며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표현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자격과 가치는 피조물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정하는 것으로 창조주께서 자기 아들의 피 값으로 나를 샀다면, 나는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존재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찮은 존재,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겸손은커녕 오히려 오만이고 교만일 뿐이다. 

둘째, 프로이트적으로 과거에만 천착하는 태도는 마땅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 이야기의 범위는 과거에 대한 기억에 국한 되지 않고, 반드시 현실과 소망을 엮어내기 때문이다. 

셋째,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과학적 역사주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는 순행적인 동시에 역행적으로 교차 편집되어 메시지를 산출해 내는 까닭이다.

 

 

위인(偉人)은 훌륭한 업적을 이룬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위인을 이상화하고 추앙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린 시절, 나 역시 위인에 대한 환상을 성실히 키우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여러 차례 경험한 환멸은 위인에 대한 이상화를 그치게 만들었다. 이제 내게 위인이란 나와 다르지 않은 성정(性情)을 지녔으나, 특정 부분에 있어서 자신을 벼르고 단련시킨 까닭에 일정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어린 시절, 내게 헨리 나우웬은 이상적인 위인이었다. 그 후에 그가 불안장애에 동성애 성향까지 갖춘 연약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크게 실망했다. 헨리와 헨리의 작품 사이에 놓여있는 좁힐 수 없는 간극에 우후죽순 피어나는 환멸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의 연약함은 그의 메시지를 부정하는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세월은 죽은 헨리 나우웬과 그의 작품은 변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예외다. 나는 변했다. 이제 더 이상 헨리의 연약함은 그의 글을 폄하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큰 도움을 줄 뿐이다. 자신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만을 사랑하고 섬기려 했던 그의 결단과 각고의 노력과 지속적인 자기 부인이 나로 눈물 짓게 한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그를 위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만 같다. 

 

 

 

 

#Feb. 25. 2023.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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