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책,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를 읽고.
이 책,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는 유다이즘 신학자가 쓴 종교 철학 책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저자의 에큐메니칼적인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토라가 나의 성경이기도 한 까닭인지 내게 이 책은 특별히 신론과 인간론을 내용으로 하는 교리 신학책으로 읽혔다. 저자의 문장들을 통해 형상화된 신론과 인간론은 깊이가 있고 아름다웠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신비를 두르신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을 닮은 역시나 신비한 인간에 대한 문장이 지시적, 설명적일 수는 없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한 존재들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은 그나마 시적, 문학적 언어일 테다. 특별히 ‘13장 한 분 하느님’과 ‘11장 신앙’ 그리고 ‘26장 경건한 신앙인’은 문학적으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몇 번씩 읽기를 반복했다.
종교는 존재하는 무엇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 우리에게 특정한 방법으로 살 것을 요구하시는 그분께 대한 응답이다. -본서 중에서
종교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다. 종교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쪽은, 곧 그 신조나 의식, 제도 따위는 목적(the goal)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a way)이다. 목적은 “정의를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너희 하느님과 더불어 겸손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종교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쪽이 목적이 될 때에는 불의가 그 수단이 된다. -본서 중에서
책은 두 개의 기둥으로 세워져 있다. 한 쪽 기둥은 ‘하느님의 문제’이고, 다른 쪽 기둥은 ‘삶의 문제’다. 각 기둥들 위에 새겨진 문장들 중, 나의 인식의 그물에 걸린 것들을 대강 세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는 ‘하느님의 문제’에 속한 문장들이다.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인습적인 개념들과 지식적인 상투 어구들에 익숙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기이하게 여기며, 갑작스런 경이, 망연자실 우두망찰하는 상태는 존재하는 것을 순수하게 깨달아 아는 데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것들이다. ... 의심보다는 놀람이 지식의 뿌리다. ... 사고의 본질은 발명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 편리함의 방편으로써 만날 때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기 위하여 정보를 탐색한다. 놀람이라는 수단으로써 만날 때 우리는 세계에 응답하기 위하여 감상을 더욱 깊게 한다. 편리함의 언어는 힘이요, 놀람의 언어는 시다. ...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믿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놀라고자 하는 의지다.
하느님이라는 개념이 우리를 압도하지 않는 한, 우리가 ‘그래서?’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우리가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관해서다. ... 궁극적 놀람은 호기심과 같은 것이 아니다. 호기심은 지식을 추구하는 마음 상태요, 궁극적인 놀람은 마음을 추구하는 지식의 상태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찾는 하느님의 사념(思念)이다. ... 신앙은 우리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의도도 없이, 의지도 없이, 그것은 생겨난다. ... 그분을 찬양할 줄 모르고서는 그분을 아는 법을 깨우칠 수가 없다. 찬양은 우리가 경이에 대하여 내놓는 첫 번째 대답이다.
철학은 인간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종교는 하느님의 질문과 인간의 대답으로 시작한다. ... 하느님에 대한 응답은 복사(複寫)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영혼이 각자 원본을 지녀야 한다. ... 하느님을 하나의 취미삼아, 임시 고용된 일자리처럼 생각하면 문제를 바로 세우는 일조차 할 수가 없다. ... 하느님, 그분은 가장 중요한 분이 아닌 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분이다.
하느님을 완전한 존재로 보는 관념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언자적 종교의 산물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산물이다. ... 십계명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완전하심을 말하지 아니하고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당신을 말씀하신다. ... 하느님은 의미한다. 곧 사람은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님을, 일시적인 것의 본질은 영원한 것임을, 순간은 무한한 모자이크 안에 있는 영원의 상(像)임을, 하느님은 의미한다. 곧 거룩한 타자성 속에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음을(Togetherness of all beings in holy otherness.)
그러나 하나 됨은 사명이지 조건이 아니다. 세계는 다툼, 불화, 분열 속에 놓여 있다. 하나 됨은 실재 안에 잇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초월하여 있다. ...그 하나 됨의 회복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며, 그것의 성취야말로 메시아의 구원의 본질이다. ... 하느님의 하나임(unity)은 하느님과 모든 사물을 하나이게 하는 힘이다. 그분은 스스로 하나면서 세상과 하나이고자 끊임없이 애쓰신다.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분을 우리 마음속의 어떤 대상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종교는 경험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경험의 끝은, 우리 자신이 지각(知覺)되는 존재임을 지각하는 것이다. ... 하느님에 대한 사유는 그분이 주체(subject)가 되고 우리가 객체(object)가 됨으로써 가능하다.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를 그분께 노출시키는 것이요, 우리 자신을 그분의 실재 반영(反映)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 종교인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에게 알려지는 존재며 그분의 사유의 대상임을 깨닫는 사람이다. 철학자에게 하느님은 하나의 객체(an object)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주체(the subject)다. ... 그가 간절히 바라는 일은 그분에게 전적으로 사로잡히고, 그분의 대상이 되어 그분에게 알려지고 감각되는 것이다. 그의 사명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게 아니라 거기에 침투되는 것, 그분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알려지는 것, 그분을 우리에게가 아니라 우리를 그분에게 노출시키는 것, 판단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판단당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 성경은 인간의 신학(theology)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간학(anthropology)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본질보다 인간을, 인간에게 그분이 묻는 바를, 다룬다. ... 그분은 발견될 대상이 아니라 계시의 주체다.
생명의 본질은 강렬한 관삼과 보살핌이다. ... 어린 아이는 사물들과 타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환경을 발견함으로써가 아니라 타인의 관심을 알아보게 됨으로써 사람이 된다. 타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그가 사람이다. ... 남들에 대한 관심은 폭의 확장이 아니라 상승이다.
예언자들은 숨어 있는 하느님(the hidden God)이 아니라 숨으시는 하느님(the hiding God)을 말하고 있다. 그분의 숨으심은 그분의 본질이 아니라 기능이다. 영속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행위다. ... 숨어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숨으시는 하나님은 발각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변덕스런 생각에 대한 영혼의 증언이다. ... 고결한 인간에게는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거룩한 일이며 감사함으로써 온몸을 떨게 된다. ... 기억은 신앙의 근원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 성경이 명령하는 것들을 기억하라는 한 마디로 압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 회상은 거룩한 행위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거룩하게 만든다. ... 우리의 의식으로 멀지 않은 곳에 말없이 천천히 흐르는 개울이 있다. 그것은 망각의 개울이 아니라 추억을 개울이다. 그 개울에서 우리의 혼은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 끊임없이 추억을 마셔야 한다. ... 영의 세계에서는 개척자가 될 수 있는 자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 영적인 표절의 대가는 자신의 정직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자기 확대는 자기 배신이다.
도그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유의 종점이 아니라 사유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길의 겸허한 이정표가 되지 않을 때 도그마들은 장애물일 뿐이다. ... 인간은 흔히 교리로 신을 만든다. 자기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대상을 새겨 만든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니라 교리들을 믿는다. 하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신조를 위해서, 신앙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을 위해서, 그 교리들을 숭배한다. ... 신앙인은 자주 아무것과도 비교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깨달음을, 대중에 의해 생산된 일반 개념과 바꾸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 신앙은 신조로 변형될 때 이성의 인습적인 술어로 표현된다. ... 이성 없는 신앙은 벙어리요 신앙 없는 이성은 귀머거리다.
다음은 ‘삶의 문제’에 속한 문장들이다.
행복이란 사실상 자신이 남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다.
종교를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충족 혹은 구원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 내리는 것은 종교를 세련된 형태의 마술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 안에서 자기 요구들의 충족을 구하고, 영원불멸에 대한 보장이나 사회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장치를 찾는 한, 그가 섬기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분의 임재는 더욱 확실하다. 자기에게 군대, 공장, 영화 따위가 필요하듯이 하느님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하느님을 인간의 요구에 대한 답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그분을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그분의 뜻과 충돌되는 우리의 이익을 포함하여 우리 안에서 그분을 대적하는 모든 것들과 싸우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그의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보다 더 훌륭해질 수 있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받고 태어났다. “악한 성향”이 보인다 하여 낙담하며 안 된다. 그에게는 악을 정복할 능력이 있다. “하느님은 이간을 바르게 만드셨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께는 왜 ‘악한 성향’을 만드셨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하느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악으로 만들어 버렸다.”
유다이즘은 일상의 행위, 삶의 하찮은 것들을 다루는 신학이다. 뛰어난 자들을 훈련시키는 것보다는 평범한 자들을 보살피는 데 더 신경을 쓴다. 유다적 생활방식의 특징은 지나친 낭비나 고행, 금욕보다는 겸허하고 수수한 경건에 있다. 그러기에 그 목적은, 평범한 것을 고상하게 만들고 속된 사물들 속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부여하며,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에 조화시키고 미세한 부분을 전체와 부합되게 하며, 여럿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서로 갈등하고 대치하는 우리의 존재를,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일치에, 그 성스러움에, 맞추는 데 있다고 하겠다.
경건한 삶이란 하느님의 임재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이다.
결국, 경건이란 하느님의 뜻에 충절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신앙인은 그 뜻을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여 순종한다. 인생은 연금(年金)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임이다. 놀이가 아니라 사명이다. 호의로 받은 선물이 아니라 명령이다. ... 경건은 하느님의 뜻을 좇아 인생행로를 걷고자 하는 결의를 뜻한다. ... 그에게는 길이 목적지 보다 중요하다. 그의 운명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모두 내어 바치는 것이다. 그의 모든 행동은 다만 섬기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 ... 자기를 신에게 바치는 이 행위는 하느님이 생명을 선물로 주심에 대한 인간 쪽의 마땅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에게 얻은 지식은 순수한 배움은 이성(의심과 합리성)이 아니라 놀람(경이와 찬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인간의 주체적 역할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그분에 대한 나의 갈망은 나에 대한 그분의 갈망에 대한 응답), ‘완전한 하나님’은 성경에 근거한(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노예 상태의 인간을 해방시키신 분으로 이야기한다)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산물(이성 작용에 의한 공리)이라는 것, 랍비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발음할 수 없는 네 글자 YHWH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엘로힘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는 것 등이다.
개신교 기독교인인 내가 유다신학자의 신론과 인간론을 읽고 크게 감동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다. 그와 나의 공통점이라면 ‘토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것일 텐데, 역시나 하나님은 한 분임에 틀림이 없으시다. 저자와 나의 하나님은 찬송과 영광과 높임을 받으소서!
#Jan. 14. 2023. 글 by 이.상.예.
'그 여자의 보물창고 > HIS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타일, 인문학을 입다 (0) | 2023.02.11 |
---|---|
동쪽 빙하의 부엉이 (0) | 2023.01.28 |
보이지 않는 도시들 (0) | 2022.12.24 |
걷기의 인문학 (1) | 2022.12.10 |
클레멘티나는 빨간색을 좋아해 (0) | 2022.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