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고.
쿠빌라이 칸은 마르코 폴로의 도시들이 서로서로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이런저런 도시들의 풍경은 여행이 아니라 기본 요소들의 교환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본서 중에서
소설은 이야기다. 그리고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마르코 폴로이고, 이야기를 듣는 이는 중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이다. 이야기의 소재는 도시로써 총 55개의 도시들이 1부에서 9부까지 적당히 흩어져 배치되어 있다. 각 도시들은 ‘기억, 욕망, 기호, 교환, 눈, 이름, 죽은 자, 하늘’과 같은 명사와 팔짱을 끼기도 하고, ‘섬세한, 지속되는, 숨겨진’과 같은 형용사를 지팡이로 붙들고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 명사와 형용사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도시들은 그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이는 마치 커다란 연회장에서 잘 차려입은 남녀의 무리들이 서로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춤추는 모습처럼 보인다.
현명하신 쿠빌라이여, 도시를 묘사하는 말들과 도시 자체를 혼동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폐하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습니다.
-본서 중에서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해주는 도시들은 가상의 것들이다. 그것도 마르코 폴로 개인의 경험과 언어에 의해 채집된 것이다. 그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과 언어(선이해와 같은 지식을 포함한)로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야기된 도시가 실제 도시일 리는 없다. 제 아무리 섬세하게 표현한다 해도 그것은 한낱 도시의 파편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가상적이지 않은 도시 이야기는 없어 보인다. 반면, 마르코가 노골적인 가상의 도시들을 이야기할 때면, 그것이야말로 도시의 진면목인 듯 느껴지기도 했다. 공부하듯 그들 문장에 밑줄을 그어댄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트루데와 완전히 똑같은 또 다른 트루데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세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의 트루데로 뒤덮여 있을 뿐이고 단지 공항의 이름만 바뀔 뿐입니다.”
-본서 중에서
런던, 암스테르담, 프라하, 크라쿠프, 바르샤바를 차례로 방문한 한 뒤 하영양이 말했다.
“유럽은 다 똑같은 것 같아. 지루해.”
그녀가 대학 진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우리는 그녀 없이 몇 개의 도시들을 더 방문했다. 비엔나, 부다페스트, 소피아, 자그레브. 우리는 그녀가 있을 때와 똑같은 패턴으로 여행했다. 덕분에 우리는 매번 같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도시들은 언제나 다르게 기억되었다. 때로는 명사와 함께, 더러는 형용사와 더불어 기억되었다. 미술관의 끝판 왕 비엔나, 봄의 왈츠 부다페스트, 소피아와 기독교 미술과 딸기, 자그레브와 대림절(Advent) 축제와 막시미르 파크.
그러고 보니, 우리가 번번이 도착한 곳은 트루데였다. 단지 공항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투르데 또한 없었다. 트루데1, 트루데2, 트루데3…은 휘발되었고, 그 자리에 파사데나, 카렌, 키암부, 니부끼, 뻬뜨로빠블리브스카야 보르샤히브까가 비로소 톡특하게 착색되었다. 시간이 깃들고 나서야 비로소 본연의 특색을 지니게 되는 것이 공간인가 보다.
“매일 눈앞에서 필리스를 바라보고 필리스가 가진 것들을 한없이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겠다.”
폐하는 그저 눈으로 한번 훑어보고 도시를 떠나야 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떠나지 않고 필리스에 머물며 여생을 보내야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곧 도시는 폐하의 눈앞에서 빛을 잃고 원화창, 선반 위의 상, 둥근 지붕 들은 사라져버립니다.
-본서 중에서
예술적 기법인 ‘낯설게 하기’의 월권(越權)은 공공연하게 용인된다. 일상생활에도 낯설게 하기는 꽤나 유용한 삶의 기술(the art of living)이다. 반복과 되풀이를 통해 타성에 젖은 지루한 필리스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롭고 흥미로운 필리스가 된다. 그러나 영구히 새롭고 흥미로운 대상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일종의 각성제와 같이 낯설게 하기의 약효는 빠르게 약해지고, 그러면 이전보다 훨씬 더 지독한 권태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한 생의 연명이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생을 위해서 낯설게 하기는 나름 요긴하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필리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필리스의 변화를 압도하는 속도로 자동화된다. 굳어버린 시각에 의해 타성에 젖은 언어의 성에 갇힌 필리스를 전경화(前景化)하기 위해서는 눈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마음의 형태는 고체보다는 액체에 가깝다. 유동성(流動性)을 성질로 갖는 까닭이다. 마음은 언제나 지향하는 방향을 따라 흐른다. 이를 테면, 위에서 아래로 자연적으로 흐르기도 하고, 애써 파놓은 고랑을 따라 인위적으로 흐르기도 한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마음은 바다에 가닿고, 고랑을 따라 흐르는 마음은 논이나 밭에 이른다.
마음을 그대로 두면, 이 세대를 따라 흘러 자연스럽게(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멸망에 이른다. 반면, 마음을 의도적으로 파놓은(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고랑을 따라가게 한다면 영적 제단(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가닿는다. 그 제단 위에서 마음은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말씀을 담지하게 된 몸으로 하여금 성육신적 삶을 살아가도록 단속한다.
안드리아 주민들의 성격 중 기억할 만한 장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자신감과 신중함입니다. 그들은 도시에서의 모든 혁신이 하늘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하며 모든 결정을 하기 전에 그 결정이 그들에게 그리고 도시와 세계 전체에 초래할 위험과 이득이 무엇인지를 계산합니다.
-본서 중에서
어쩌다 보니, 도시 용인은 또 하나의 필리스가 되었다. 그 와중에 그분은 유진 피터슨의 책 <응답하는 기도>를 통해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것은, 네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용인은 바로 그 시냇가다.”
선교지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되풀이 하고 있는 까닭에, 진부함과 지루함은 먼지처럼 항상 주변을 배회한다. 마음이 제단을 지향하도록 먼지구덩이 속에서 고랑을 파는 나는 여전히 영적인 노동자다. 노동자의 제일 덕목은 잘 먹는 것이다. 자신감과 신중함으로 지치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한다. 내게 독서는 먹는 일이다.
더 이상 취미일 수 없게 된 독서를 끝내 직업들 중 하나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노선이 취미에서 일로 바뀌었으니, 아마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매너리즘이 독서에 들러붙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도시는 무려 용인이다. 그분이 시냇가로 인정한 용인. 시냇가에 옮겨 심겼으니, 어쨌거나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어려울지언정 기어이 형통하리라.
#Dce. 24.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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