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생의 실루엣

창고지기들 2021. 12. 25. 13:40

 

 

 

 

 

미야모토 테루의 책, <생의 실루엣>을 읽고.

 


이 책은 일종의 기념품이다. 

지난여름 여행 차 강원도 속초에 갔다가 구입한 까닭이다. 

기념품이란 것이 그 당시, 그곳에서 

눈에 띄는 것을 충동적으로 구입하기 마련인데, 

미야모토 테루의 책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 때 속초 시내의 정경이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의 결과 비슷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전체적인 독서 과정은 

누군가 낯선 이의 오래된 앨범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앨범 주인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한 장 , 한 장 낡은 사진을 구경하는 경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주인장에 대한 존경이나 동경, 

혹은 호감도가 높다면 훨씬 더 즐거운 경험이 될 테다. 

그러나 주인장에 대한 심정적 태도와는 별개로 

문장력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기에 

누가 읽었어도 좋았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달빛도 별빛도 없는 칠흑의 어둠은 

자신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모르게 만든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동시에 그런 상황에 놓이면 인간의 뇌에서는 

즉시 센서가 발동하여 청각과 촉각과 후각이 

잠들어 있던 능력을 활짝 펼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본서 중에서

 

내 케냐에서 일찍이 경험했던 것이 책 속에 고스란히 적혀 있는 것이었다. 

작가와 썩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아마 이 때부터 책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전까지는 밑줄을 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었는데 말이다. 

물론, 밑줄을 긋는 수고를 더하는 독서가 내겐 일상적인 일이지만, 

그런 수고를 할 마음이 없게 하는 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 덕분에 소설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직조해나가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 있었다. 

-본서 중에서


작가에 의하면 소설가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직조해나가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어찌 보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비단 소설가만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직조해나가는 일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직조해나가는 것은 또한 계시이기 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가 하는 일은 

계시의 그림자를 말로써 드러내는 것이다. 

말로써 직조한 그림자를 보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계시의 발화자를 가늠하게 하는 일, 

그것이 나의 일이다. 

뭐, 대체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생이란 것도 그와 같을 것이다. 

생 자체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이나, 

그 실루엣을 말로써 직조해나감으로써 

생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소설가인 작가의 자기 일에 대한 신학적 고백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게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확신이라는 마음의 힘이 그 눈 처진 남자를 불러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현실에 생겨나는 현상을, 

나는 믿게 되었던 것이다. 

-본서 중에서


작가는 히브리서 11장을 직접 경험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절대적인 확신, 

곧 믿음의 파워를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확신을 갖은 사람의 일이 

‘기다림’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그 눈 처진 남자가 등장했다고 작가는 간증(?!)했다. 

기다리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확실히 믿는 사람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다릴 수 없는 까닭이다. 

믿음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기다림의 대상을 데려온다. 

그럼으로써 믿음은 더욱 굳건해진다. 

 


기어이 오늘이 성탄절이다. 

기다리는 일을 하고 있는 내게 

기다림의 대상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을 

기억을 통해 더욱 확고히 해주는 날이다. 

기념 절기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기억하게 하여 믿음 위에 믿음을 돋워주는. 

믿음이 소망을 불러 더욱 사랑하게 해주는!





#Dec. 25. 2021.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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