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선물

창고지기들 2024. 1. 20. 15:44

 

 

 

 

선물

 

 

#1.

 

그 날은 그녀의 스물네 번째 생일날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아침부터 선물을 받은 이는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그 날, 나에게는 불식(拂拭)의 선포와 함께 거듭 태어남이 주어졌다. 이십 사년 전 그녀가 나의 배를 가르고 탄생했던 것처럼.

 

 

#2.

 

마침, 주님은 야이로의 열두 살 난 딸을 치료하러 가시던 길이었다. 그러던 도중에 일이 발생했다. 의도치 않게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아온 여자가 냅다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여자는 소매치기를 하듯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치료를 슬쩍 꺼내갔고, 치유의 능력이 날치기 당한 것을 눈치 채신 예수님은 범인에게 자수를 요구하셨다. 흐르던 피가 멈췄다는 것을 느낀 여자가 재빨리 엎드려 이실직고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마가복음 6:34)

 

바로 그 때 회당장의 집에서 딸의 부고 소식을 전해왔다. 소식을 전하던 자도, 집에서 울며 심히 통곡하던 자들도 죽음 앞에 선 예수님을 무능력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과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으로 무능력자 취급을 거절하셨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마가복음 5:41-42)

 

사람들 틈에 섞여서 나는 다시 살아난 소녀를 찬찬히 보았다. 일어나 걷다가 앉아서 먹고 있는 소녀가 나는 마냥 대견하고 신기하기만 했다.

 

 

#3.

 

흐르던 피가 완전히 멈춘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침 그 날에 주님은 혈루증 치료를 받은 여인 옆에 있던 내게 완경을 선언하셨다. 출혈이 완전히 멈춘 나를 향해서 “딸아!”라고 부르시면서, 읽고 있던 책을 통해서 격려해주셨다.

 

소녀는 월경을 통해서 여성이 된다. 피는 신비롭고 신성한 것이다. 여성은 임신할 때까지 매달 피를 흘린다. 그리고 아홉 달 동안 출혈을 멈추고 새로운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된다. 여성은 아기를 만들기 위해 몸 안에 있는 피를 품고 있다고 여겼다. 아기를 낳은 후에 또다시 매달 피를 흘리다가 완경이 되면 출혈이 멈춘다. 이 또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아기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만들기 위해서 피를 품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진 시노다 블랜(Jean Shinoda Bolen)의 말

 

 

그러니까 나는 지혜를 임신 한 셈이다. 그래서 출혈이 멈춘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자궁에 품은 지혜를 자라게 해야 한다. ‘지혜의 산전 관리와 태교는 어찌 해야 하지?’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다시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달리다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명령을 따라 내 안의 열두 살 소녀, 지금껏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물론 나였다. 초등학교 6학년. 아직 생리를 시작하기 전의 나였다. 완경이 선포된 날에 열두 살 소녀인 내가 다시 살아나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그러고 보니, 요즈음의 나는 ‘대체 나는 누구일까?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할까?’하며 새로운 정체성, 곧 자기다워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딸의 생일날, 나는 주님으로부터 마침과 시작을 선물 받았다. 바야흐로 곰곰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두리번거리며 관찰하며, 거듭해서 묻고 따져볼 때에 이른 셈이다. 지혜를 임신한 할머니(!)이자 고작 열두 살 먹은 소녀(!!)로서 다시 시작할 기회를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기다워짐으로 일어나 내내 즐겁게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키리에 엘레이손!

 

 

 

#Jan. 20. 202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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