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례
“쓸데없이 고퀄이야!”
가족들이 나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이 아닌 것은 정말 아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변두리 묵상가로서 살아가는데 목회학 석·박사 학위나, 각각 십여 년 씩의 목회와 선교 경험, 그리고 이십여 년의 큐티 원고 집필 이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굳이 그와 같은 것들을 겸비하고 말았다. 나의 열정과 의지로 획득한 것이 아닌 까닭에 그리 자랑스럽지는 않다. 자랑은커녕 오히려 숨기는 편이다. 내게 그것들은 그분의 콜링에 대한 반응으로 생긴 일종의 흉터(?!)와 같은 것이기에.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라(행 16:2-3)
한 사람의 헬라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할례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사역자, 그것도 헬라파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포괄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할레는 유의미하다. 이것이 바울은 디모데로 할례를 받게 한 이유일 테다. 굳이 받지 않아도 될 할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고통 중에 누워있는 청년 디모데를 생각하면 안쓰럽고도 기특하다.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인 것처럼 나의 성별은 여성이다. 헬라인 아버지가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지도하는데 걸림돌이 되듯이, 여성이라는 성별은 일부 장로교 그리스도인을 지도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어쩌면 주님은 나를 데리고 사역하시기 위해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 할례를 베푸신 것인지도 모른다. 학위, 이력, 선교 경험은 그분이 내게 베푼 일종의 할례인 셈이다. 그렇게 나는 그분의 열심으로 쓸데없이 고퀄이 되었다.
최근에 한 교회에서 지나간 묵상 여정을 나눌 기회를 가졌다. 변두리에 처박혀 지내던 묵상인에게 사적으로 굳이 어렵게 연락해온 젊은 사역자의 신실한 열정을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아를 부인하며 한 달 정도를 준비한 끝에 일인분의 묵상 여정을 이틀에 걸쳐 간략하게 나눴다. 그 때 그 공동체에서 나를 부르는 호칭은 “선교사”였다. 선교사의 묵상 강의는 고난을 자랑하는 것으로 점철되었고, 한가득 풀어놓은 고난으로 누구보다 홀가분해진 것은 바로 나였다.
무거운 이야기를 풀어놓고 한결 가벼워졌을 때, 또 다른 공동체로부터 연락이 당도했다. 묵상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그 보다는 쉬운 법이다. 그들의 필요를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또 다시 수락하고 말았다. 쓸데없는 고퀄에게 이번에는 어떤 쓸모가 생겨날지, 나마저도 궁금해진다.ㅋ~
아들의 대학 입학을 위해 미국에 와 있다. 삼 년간의 홈스쿨링으로 삼시세끼를 함께 먹으며 동고동락하던 아이를 떼어 놓고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어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오래 전 그가 프리 스쿨을 다니던 시절이 떠오른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3살 하진군이 눈에 아른 거린다. 그 때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고퀄이 된 그다. 그리고 앞으로 홀로 그분과 동행하며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퀄로 성장할 그를 소망해 본다.
쓸데없는 고퀄은 없다. 그분의 섭리를 따라 된 고퀄은 그분의 때를 따라 쓸모가 깃들기 마련이다. 게다가 고퀄이 되는 과정 중에 쓸데없는 것은 한 개도 없다. 매 할례마다 디모데와 함께 아파 누웠을지언정 아픔과 상처가 아물지 않은 적 없었고, 아프고 나면 성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당장은 쓸데없을지라도 꾸준히 근면하게 고퀄이 되기를 선택한다. 다음 학기도 열심히 공부를 마음 먹는다. 키리에 엘레이손!
#Aug. 18. 2023.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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