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윌슨의 책, <그와 차를 마시다>를 읽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았을 때,
가끔 헌팅턴 라이브러리에 갔었다.
그곳은 헌팅턴씨가 패서디나 시에 기증한
헌팅턴씨 개인 소유의 집인데,
평범한 가정집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세계적인 갑부였던 까닭에
기껏해야 마그넷 정도를 모으는 나와 같은 부류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았던 헌팅턴씨였다.
세계 각국의 정원들을 모아
자기 집에 모조리 조성하는가 하면,
서재도 단독 건물의 커다란 도서관
(희귀한 자료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으로 꾸며놓았으며,
하루 종일 걸어도 다 못 볼 정도의 미술품들과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은 수많은 박물관들과 식물원 등이
헌팅턴씨네 집을 구성하고 있었다.
한 번은 남편이 헌팅턴 라이브러리 측에서
엄선하여 선정한 리서치 펠로우가 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입장료 없이 공짜로 그곳을 즐기기도 했었는데,
화려한 진열된 도자기와 은제품 세트들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것은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 시대의 귀족들이 애용했을 법한 것들로
홍차를 우아하게 즐기기 위해 제작된 티 포트와 찻잔과 소서,
그리고 디저트를 위한 접시들이었다.
어찌나 멋지고 예쁘던지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었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가 홍차가 아니라 커피에 열광을 하는 탓에,
내 수중에 있는 것이 우아하고 예쁜 찻잔이 아니라
투박하고 실용적인 머그잔뿐임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케냐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던 당시,
현지인들이 오전과 오후에 반드시 티타임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차를 우려낸 뒤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은 차이(밀크 티)와 함께
만다지(속이 텅 빈 일종의 공갈 도넛)나 사모사(고로케와 비슷한 종류)를
먹고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는 그들이었다.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던 지라,
영국인들의 홍차 문화가 이식되어 나름대로 토착화된 것이었다.
영국의 홍차 문화의 시작은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책 <그와 차를 마시다>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을 살다간
작가 제인 오스틴이 일상에서 누렸던 차 문화를 가볍게 살펴보고 있다.
제인 오스틴은 매일 가족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이 책임에는 아침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차 만드는 일이 있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정말 맛있고 향기로운 차 한 주전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방법을 써야 한다. 차를 사랑했던 제인 오스틴은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가족들의 차를 만들었을 것이다. -본서 중에서
중국에서 들여온 차가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찰스 2세의 왕비 캐서린을 통해서다.
처음에 홍차는 매우 새롭고 값비싼 음료였다.
중국으로부터 수입되거나 자체 제작된
값비싼 티 세트(도자기 잔, 티 포트 등)에 담아
마호가니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마시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홍차를 즐기는 귀족들이 늘어나자
호화로운 차 정원(입장료가 있는)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수없이 다채로운 티 파티가 열렸다.
즉, 차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커다란 문화로 진화했고,
산업과 상업이 그것의 대중화를 성공시키자
차는 결국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그 결과 차는 케냐인들에게마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되었다.
제인 오스틴이 즐겼던, 홍차와 토스트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아침 식사는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통적이니 영국 아침 식사는 맥주와 에일이 포함된 푸짐한 음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말, 많은 사람들, 특히 상류사회 사람들은 그런 아침 식사를 구시대적이며 촌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1700년대 초반, 앤 여왕은 그때까지 통상적으로 아침에 마시던 무거운 알코올음료 대신 가볍고 상쾌한 홍차를 택함으로써, 최초로 아침 식사에 차 마시는 습관을 정착시켰다. 신사와 숙녀들은 앤 여왕의 선례를 따랐고 차는 곧 진정으로 세련된 아침 식사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세련된 새 음료에 어울리도록 상류층은 더욱 섬세한 아침 식사로 입맛을 길들였고 점차 고기 같은 무거운 음식은 피하게 되었다. -본서 중에서
커피 문화권에 속한지라,
매일 한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중이다.
아침에는 식사용 빵과 함께 블랙커피를 어김없이 마시며,
오후에는 기회가 주어지면 주로 라떼를 마신다.
최근에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는
티를 마시게 되었는데,
텀블러에 돼지감자 티백을 우려서 마신다.
(이름도 참, ‘돼지감자 티’라니!
그래도 당뇨에 좋은 기능성 티라니, 어쩌겠는가!ㅋ)
간편하게 티를 즐길 수 있게 해준
티백이 발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덕분에 나와 같은 서민들도 질 좋은 티를
싸고 간편하게 즐기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제인 오스틴처럼 블랙 티를 즐기지 않는다.
뿌리채소를 재료로 만든 차를 나는 선호한다.
특유의 구수한 향과 감칠맛이 좋다.
모든 소설마다 차는 작가에 의해서 인물의 안내문처럼 쓰였다. 차를 알고 그 가치를 알아볼 줄 안다는 것은 그 인물이 선과 정의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홍차를 경멸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역행하며 무지한 인물로 표현됐다. 홍차를 거부한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도덕성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리에 대항하는 것은 어려웠다. -본서 중에서
책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게 된 것은
홍차와 커피의 젠더적 성격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이긴 하지만,
홍차는 여성적이고 커피는 남성적이다.
우아한 웨지우드 도자기 세트를 사용하여 마시는
홍차가 있는 풍경과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어렵지 않게 구분 지을 수 있다.
우리 집의 경우만 보더라도,
커피 마니아는 남편이고
딸아이는 커피보다 밀크티를 훨씬 더 선호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차보다는 커피가 좋다.
하지만 커피 잔보다는 찻잔에 훨씬 더 매혹된다.
어느 날 커피보다 차를 즐겨마시게 된다면,
그것은 차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찻잔이 좋아서 일 것이다.ㅋ
(이제 막 18세가 된 피 끓는 아들 녀석은
커피도 차도 아닌 초지일관 차가운 요거트 스무디다!ㅋ)
나는 커피나 차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을 마시는 분위기,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마시며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을이 깊어져가는 요즘,
한 잔의 차가 아쉬운 것은 제인 오스틴처럼
까탈스럽도록 자기 취향이 확실한 사람과 함께
오래도록 수다를 떨고 싶어서 일 것이다.
#Sep. 3. 2022. 글 by 이.상.예.
'그 여자의 보물창고 > HIS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늙어버린 여름 (1) | 2022.10.01 |
---|---|
실낙원 (0) | 2022.09.17 |
만든 눈물 참은 눈물 (0) | 2022.08.20 |
교회됨 (0) | 2022.08.06 |
베갯머리 서책 (0) | 2022.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