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책, <만든 눈물 참은 눈물>을 읽고.
이 책은 일종의 기념품이다.
작년 여름, 강원도 속초를 잠깐 방문했을 때
동아 서점에서 여행 기념으로 구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해 7월을 추억하며 책을 펼치자,
매미가 맴맴맴 (노래한 것이 아니라) 울었다.
7년을 기다린 뒤 세상에 나와
고작 한 철을 울다가는 매미.
나이가 들어서 일까?
올 해는 여름의 운치를 더해주는
매미 소리가 부쩍 서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을 때만큼은
그들의 통곡이 서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만큼 재밌는 책이었다.
내 짧은 소설들이 카프카적 질문과 톨스토이적 대답을 담고 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지한 질문의 방식과 대답을 향한 성실한 탐구의 태도가 나를 매혹했고, 이 글들을 쓸 때 내 가슴속에 있었다는 사실은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책을 읽은 누군가 수수께끼 같은 이 세상에 대한 짧은 질문이나 희미한 대답의 실마리라도 찾아냈으면 참 좋겠다, 하고 감히 바라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출판사 <마음산책>은 이 책을 ‘짧은 소설’로 명명했다.
짧은 소설이라고 해서 단편 소설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그보다 훨씬 분량이 적은 엽편 소설과
콩트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들 짧은 소설에도 작가의 의도와 바람은 담겨있다.
수수께끼 같은 이 세상에 대한 짧은 질문이나
희미한 대답의 실마리라도 담아낼 수 있기를,
작품 자체가 독립적으로 독자들에게
질문이든 대답이든을 던져주기를
작가는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그의 소원이 정말 그러하다면,
나는 작가에게 축하 인사를 전해주고 싶다.
ㅎ~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났어요. 이 집은 내가 태어난 순간을 알고 있고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이 집과 함께 자랐고 같이 늙어가고 있어요. 집은 내 몸의 일부와 같아요. 몸 어딘가에 상처가 생기면 약을 바르고 다리가 부러지면 깁스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 거예요.” 집이 신체의 일부라는 말은 이상스럽게 감동스러웠다. 한 번도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축재의 수단으로 간주 하지도 않았지만 신체의 일부로 여기지도 않았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앙이 집에 정성을 들이는 모습은 신체의 일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치료를 하고 수술을 하며 사는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고치고 손보고 어루만지며 집과 같이 늙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자 울컥했다. 크리스티앙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 있어요. 네 집을 네 몸과 같이 여겨라. 네 집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우리 아들에게 내가 항상 해온 말이기도 하지요.” 유는 부끄러움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감정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서, <네 몸과 같이> 중에서
나 또한 이야기 속 화자인 유처럼
‘재산을 불리는 일에 관심도 없고
기술도 없어서 쉰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자기 집 없이 살고’ 있다.
그 동안 집 없는 설움을 부단히도 당해온 터라
이야기가 결코 짧지 않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또 다시 이사를 코앞에 두고 있는 까닭에
더욱 그러했다.
내 지나온 삶의 여정은 내가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인 노마드(Nomad)임을 가르쳐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마음에 드는 집을 열망해 왔다.
그것은 아마도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마음에 꼭 드는
하우스(House)에서 끝내 살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 동안 20군데 이상의 월세 집들을 전전하면서
매번 실망과 안타까움을 달래야만 했던 젊은 시절의 나,
그 집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야만 했던
노마드인 나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통해
나를 위로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배달 된 것이 있었다.
지금껏 나는 단 한 번도 마음에 들지 않은
홈(Home)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4년 정도 살았던 집들 중에서
스윗 홈(Sweet Home)이 아니었던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 앞에서
감사가 태도가 아니라
감정이 되어 코끝이 뜨거워졌다.
내게는 여전히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할 하우스는 없다.
그러나 내게는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할 홈은 있다.
어떤 하우스(place)에서든
그곳을 아름다운 홈(space)으로
창조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 이사할 곳에서도
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홈을 창조하고야 말 것이다.
나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하루 세 끼 빵만 먹는다는 사람한테 왜 그런 걸 먹고 사느냐고 비난하지 않아요. 내가 왜 그러겠어요? 왜냐하면 그건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할 그 사람들 개인의 취향이고 기호고 삶의 방법이니까요. 내가 무슨 옷을 입든 그건 내 취향이고 기호고 삶의 방법인 거예요. 제발 좀 내를 내버려둬요. 내가 짧은 옷을 입든 긴 옷을 입든, 흰옷을 입든 검은 옷을 입든 대체 당신들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그럼 벗고 다니란 말이에요, 뭐예요, 도대체?
-본서, <그럼 벗고 다녀요?> 중에서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온
하영양의 여름 패션 중에는
노출이 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러니까 그녀의 개인적 취향과 기호를 존중하는 나는
그것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걸을 때마다
힐끔거리며 그녀를 더듬는 눈길들과
거듭 마주치게 되자,
결국 한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잔소리는 하지 않아도, 한 소리는 하는 나다)ㅋㅋㅋ
시작은 우리의 정체성(그리스도인)으로부터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개인주의 윤리의 한계를 꼬집으면서
우리의 윤리가 공동체(교회) 윤리임을 확실히 한 후,
개인의 취향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으로 하는
바울의 자유사상에 근거하여
기꺼이 자신의 취향마저 이웃 사랑을 위해
기꺼이 접어두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로
한 소리를 맺었다.;;
연약한 형제들을 배려하여
자기 권리나 취향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기 취향과 권리를 위해 자기주장을 굽히지 말라고
부추기는 세상에 살고 있는 탓이다.
그러나 그녀와 나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진리가 지목하는
더 가치 있고 옳은 일을 위해
우리는 우리들의 권리와 취향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처음보다 얌전해진
그녀의 옷차림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20년 만에 귀국한 뒤,
이제 막 정착을 시작하는
그녀의 한국에서의 여정을 축복하며,
보다 성숙하고 깊어지는 그녀가 되길 소망해본다.
#Aug. 20. 2022. 글 by 이.상.예.
*)북리뷰를 이렇게 끝낸다고?
아무렴 어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