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쇼나곤의 책, <베갯머리 서책>을 읽고.
요즘 나는 목침을 베고 잔다.
할아버지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것을
선뜻 계승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나이 탓이 크다.
간절한 필요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기어이 깨버린다.
목침에 정착하기까지 나는 베개 노마드였다.
갈수록 뻣뻣하고 뻐근한 뒷목을 밤새 편안하게 받쳐줄
이상적인 베개를 찾기 위해 다양한 종류들을 전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목침이 내게로 왔고,
내게로 와서 나의 베개가 되어주었다.
세이쇼나곤의 책,
<베갯머리 서책>을 처음 만져(!) 보았을 때,
목침이 떠올랐다.
물론, 제목이 한 몫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864페이지의 두께를 가진 아담한 책의 외모가
오래 전 외할아버지가 베고 주무시던 목침과 닮은 까닭이었다.
그에 비하면 내 것은 보다 낮고, 훨씬 길다.
벨 때마다 반절로 잘라놓은 기다란 단무지가 생각난다.
시큼 빠작한 단무지를 좋아하는 나로선 나쁘지 않다.ㅋ
<베갯머리 서책>은 수필이다.
10세기 전,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 문화를
배경으로 쓰인 글들을 묶어놓은 것이다.
저자 세이쇼나곤은 지극히 남성중심 사회에서
왕의 중궁(중전)을 모시는 여방(상궁)으로
사회적 진출에 성공한 인텔리였다.
그녀는 와카(전통적인 정형시가)와 한시문에 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시적소에 응용하여 웃전들을 즐겁게 할 줄 아는
재기발랄한 신하였다.
세이쇼나곤의 글과 함께
역자가 붙여놓은 해제를 읽는 일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 문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레이어드 룩(옷을 여러 겹으로 겹쳐 입는)의 끝판 왕이라 할 수 있는
일본 귀족들의 조형미 넘치는 아름다운 복식,
탁 트인 주택 구조, 화려한 각종 왕실 의례,
재치와 품격이 녹아있는 일상의 에피소드,
그리고 통혼 문화에 이르기 까지 독서하는 내내
나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 체험을 했다.
특히 통혼 문화의 꽃인 후조 편지의 성행이
문학의 생활화를 가져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여자들에게
각광을 받았던 시절을 엿보고 있자하니,
주책도 없이 작금의 배고픈 작가들에게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뭐니 뭐니 해도 첫울음소리(두견새의)를 들었을 때다. 봄의 끝자락에 어떻게든 남보다 먼저 그 소리를 들으려고 잠을 안 자고 기다리고 있으면, 새벽녘 어스름 속 저 멀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이는데 그 소리는 넋이 다 나갈 정도로 아름답다. 6월 여름이 끝날 무렵이 되면 더 이상 울지 않고 뚝 그치는 것도 지조가 있어 좋다. 밤에 우는 것은 뭐든지 풍취가 있고 멋스럽다. 어린아이만 빼고 말이다. -본서 중에서
현대는 시각의 제국이다.
모든 감각들 중 시각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다.
감각 불균형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까닭에
나의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은 시각을 거들 뿐이다.
그들의 본분은 마치 시각을 에스코트하는 것인 양 하다.
비디오에 얹혀서 소개되는 뮤직,
예쁜 용기에 담긴 채 화려한 화보를 통해 광고되는 향수,
영상 이미지로 선보이는 갖가지 감촉들,
그리고 먹는 방송에 이르기까지
청각과 후각과 촉각과 미각은
시각의 도움 없이는 불온전하다.
덕분에 내 눈은 피로감으로 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반면, 세이쇼나곤은 감각 균형의 시대를 살았다.
그녀의 책에는 예민한 청각, 섬세한 후각,
민감한 촉각을 통해 수확된 문장들이 풍부하다.
남보다 먼저 두견새를 촬영하기(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는
저자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두견새의 울음소리에
넋이 나갈 만큼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심미의 능력에 질투도 났다.
누군가는 작가의 가장 기초적인 동시에
최고의 자질이 느끼는 능력이라고 했다.
풍만한 감수성은 모든 감각이 골고루 예민할 때 형성된다.
그런데 나는 시각 중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각 일변(一邊)으로 치닫는 중이다.
내 글이 진전이 없는 것은 어쩌면 감각의 불균형이 낳은 질병,
곧 느끼는 능력의 형편없는 저하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ㅠㅠ
<베갯머리 서책>을 연구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역자의 꼼꼼한 해제와 해설에 의하면,
이 책은 ‘오카시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오카시 미학이란 문학적으로 ‘낯설게 하기’와 흡사하다.
그것은 상황으로부터 한 발짝 밖으로 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생겨나는 지적인 흥취다.
상황과 사물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감정이입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바라보는 상황과 사물은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것을 거리를 두고 객관적이고 감각적으로 관찰하는 행동은
과학적 발견의 과정과 맥을 같이한다.
그 과정을 통해 관찰자는 일상성 속의 비일상성을 발견하고는
재미와 흥미, 독창성과 미적 쾌락을 느낀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오카시 미학’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 중 하나로 차용될 만하기 때문이다.
오카시’라는 감정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찾아내는 힘을 가진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오카시’는 힘 들고 어려운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는 초긍정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본서 해설 중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단독으로 무대에 서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쉬지 말고 기도하라’와
‘범사에 감사하라’와 함께 그룹으로 등장한다.
각각의 문장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 그룹을 이렇게 해석한다.
‘항상 하나님을 기뻐하라.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라.’
보이는 일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감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지겹고 구태의연한 일상, 종종 찾아오는 고통과 절망,
지긋지긋한 무기력감과 나태함과
재미없음이라는 생활의 때를 낯설게 보기 시작할 때,
그 안에서 함께 고통당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 옆에서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
그 앞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 뒤에서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위와 아래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는
비로소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오카시 타임!’을 외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내게는 말씀 묵상 시간이긴 하지만,
그 외에도 오카시 타임을 의식적으로 가져 보자!
나는 성실한 모노가타리(이야기 연작) 소비자다.
반면, 세이쇼나곤은 문화 상품 소비자이기보다는 창작자이길 선택했다.
그래서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뛰어난 관찰력,
그리고 직설적이고도 간결한 문장으로
자기 이야기를 섬세하고도 세밀하게 그려냈던 세이쇼나곤은
헤이안 시대가 낳은 비범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문득, 실없는 상상을 해봤다.
시간의 문을 열고 헤이안 시대로 들어가
그녀에게 스마트폰을 살며시 쥐어주는.
그러면 아마도 그녀는 종이와 붓은 뒷전으로 하고
날마다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을 테지.
그리고 그 즐거워하는 자랑을 위해
SNS를 하느라 밤을 새기도 하겠지?ㅋ
끝으로, 세이쇼나곤 덕분에
지금껏 식별하지 못했던 감정에 비로소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낯간지러움.
이웃의 낯을 간지럽게 하는 말을 절제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대단치도 않은 사람이 자신이 읊은 노래를 들려주며
다른 사람이 칭찬한 얘기까지 보태는 것은
정말 낯간지럽다.
-본서 중에서
#Jul. 22.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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