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내 이름은 빨강 1, 2

창고지기들 2022. 6. 11. 12:58

 

 

 


오르한 파묵의 책, <내 이름은 빨강 1, 2>를 읽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곧 기억하는 것이라네.” -본서 중에서

 


어쩐 일인지 나는 개인주의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를 독립적인 개인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타인 역시 나와 같은 개인이긴 마찬가지였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성장하든지 파괴되든지 하면서 

생존하는 동시에 공존해왔다. 

특별히 서열주의에 따라 타인과의 경쟁을 부추기는 한국에서 살았던 터라, 

나의 것은 미국산 수직적 개인주의에 가까웠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 

곧 빠르게 변해가는 나의 실존적 상황을 

관찰하고 해석하기에도 벅찬 날들이었다. 

그런 내게 역사니, 전통이니 하는 것은 유명무실이었다. 

풍경의 정교한 재현이 아니라 

풍경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재빨리 캔버스에 휘갈겼던 

인상주의 작품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했다. 

 


엘레강스의 말에 의하면 원근법은 그림을 신의 시선으로부터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시선으로 격하시켰고, 베네치아인들의 기법을 모방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화풍을 이교도의 화풍과 뒤섞어 우리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겁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이 우리를 서양인들의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악마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서 중에서


어찌 보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래디컬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하면 원근법이 다스리는 질서 정연한 그림들은 

온건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그려진 것들이다. 

오랫동안 화단(畫壇)을 장악해왔던 원근법은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화가) 중심적인 화법(畫法)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중심이었던 원근법을 과감하게 따돌렸다. 

지금 이 시각에 포착된 사물의 인상을 잡아두기 위하여 

그들은 급진적인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그림을 써내려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그림들에는 그들만의 지문이 묻어났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화풍 내지는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본질은 이야기니라. 멋진 그림은 이야기를 우아하게 완성시켜 주는 게야. 이야기를 보완하지 못하는 그림은 결국 우상이 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는 우리가 믿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은 그림 자체를 믿게 되지 않겠느냐. 이것은 우리의 예언자가 오시기 전, 사람들이 캬베에 있는 우상들을 숭배한 것과 다름없느니라.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면, 예를 들어 이 카네이션이나 저 버릇없는 난쟁이를 어떻게 그림에 그려 넣겠느냐?” -본서 중에서


유럽의 회화와는 달리, 

이슬람 회화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그려졌다.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신의 관점으로 

평면적인 동시에 투시적인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게다가 이슬람의 세밀 화가들은 

그림 자체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림은 이야기의 시녀일 뿐이다. 

위대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 요량으로 

세밀 화가들은 하나의 작품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나누어 그렸다. 

결과적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그들에게 존재할 리 없었다.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화법과 전통적인 화풍(스타일)만 건재했다. 

그렇게 그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렸다. 

유일무이한 시점, 

곧 신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기억했다가, 

그것을 치밀하게 화폭에 복사하는 자, 

그가 바로 세밀 화가였다.


그러나 유럽 열강의 막대한 영향을 피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결국, 이슬람 화가들도 유럽식 원근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 대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습격의 부작용은 컸다. 

심지어 세밀 화가들 사이에 죽고 죽이는 일까지 저지르게 만들었다. 

오르한 파묵의 책, <내 이름은 빨강>은 

동서양 문화가 격렬하게 충돌했던 터키를 배경으로 

유럽의 1인칭 주인공 시점과 이슬람의 3인칭 신의 시점 간의 

첨예한 대립과 충돌을 자세히 들려주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총 59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각 장마다 

주인공이 번갈아 가면서 바뀐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된다. 

수많은 1인칭 화자들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독자에게 고자질하듯 들려주는 것은 

마치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유럽식 원근법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단 한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수많은 주인공들이 하나의 사건에 대해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특성과, 

동시에 그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라는 특징은 

1인칭 주인공 시점들의 소설을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읽히게 만든다. 

결국, 이 소설은 형식과 구성 자체로 

유럽식(1인칭 주인공 시점)과 

이슬람식(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 공존하는 

역설을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스타일이 곧 불완전함이라고 말하고 있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완벽한 그림이라면 서명이 필요 없다는 걸 말하고 있지. 세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의 교훈을 합한 것이네. 그러니까 서명과 스타일이란 결함 있는 그림을 그리고도 뻔뻔하고 어리석게 자만하는 자의 변명일 뿐이라는 거지.” -본서 중에서 

 

개인주의자의 세상에는 

1인칭 주인공 시점만이 존재한다. 

그 세상의 주인공은 나다. 

그래서 나 없이는 세상이 존재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게 개인주의자 세상에서 나는 신이다. 

그런 나의 세상에 절대자 하나님을 들인다는 것은

파국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개인주의자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대체로 착각 상태에서 벌어졌을 공산이 크다. 

그것은 내 세상의 신으로서의 내가 

하나님의 좌석을 가장 높은 위치에 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그 세상에서 나는 하나님보다 전지전능하다. 


그러나 비록 착각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진심이시다. 

이름뿐이라고 해도 일단 들어간 세계에 들어간 이상 

그분은 진짜 하나님이 되기 위해 역사하신다. 

1인칭 주인공 시점뿐인 세상을 찢어서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기어이 들이시는 것이다.  


그분은 땅에 코를 처박은 채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을 꺼내 

공중으로 부양시키신다. 

지면으로부터 높이 올린 발이 공포와 불안으로 버둥거린다. 

그러다 공중에 뜬 상태가 익숙해질 무렵, 

주인공은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자기 세계에 질서를 드리우던 원근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납작한 평면적으로 보인다. 

대신에 세계가 좀 더 넓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인다. 

부분적으로만 보던 딱딱한 주인공 시점이 

물렁물렁해지면서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훌륭한 화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종국에 가서는 우리 마음속의 풍경까지 바꿔 놓는다는 것을 말이야. 어떤 화가의 예술 작품이 이렇게 한번 우리 영혼 속에 자리 잡으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잣대가 되고 말지. -본서 중에서 

어느새 변해버린 나다. 

질색하던 조직 신학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내 취향은 아니라던 바울 서신이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던 내가 

전통과 교리의 언어를 내 삶에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스럽다. 

 

결국, 지금껏 나는 성경 묵상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나를 묵상한 것이다.

그래서 변한 것이 전혀 없는 성경에 비해,

나는 새록새록 변하는 중이다.

그렇게 나는 개인주의자에서 전통주의자로 변태하고 있다.

나의 취향과 스타일이 나의 한계와 결점을 반영한 것임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취향과 스타일이었던 전통에 서서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오롯이 나여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강박에서 자유해진 탓일까?

전보다 편안해졌다.

전통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나다워 질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역사와 전통에 안김으로써 전에는 애써 부정하고자 했던

나의 유한함 역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기억을 통해 나는 그려지고 있다.

누군가가 말했다.

기억한다는 것은 감사한다는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감사로 나를 그리는 중이다.

감사의 대상이신 그분으로 나를 그리게 하고 있다.

키리에 엘레이손!

 

 

 

 

 

#Jun. 11.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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