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책, <누가 사람이냐>를 읽고.
동물학적인 개념으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것은 인류학적인 개념으로 하느님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본서 중에서
진화 생물학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다.
말하자면, 그들은 온갖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지구 생태계의 헤게모니를 거머쥔 동물종이다.
살아남기 위해 지능을 계발시키는 동시에
온갖 거짓말과 권모술수, 그리고 폭력성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온 종이 호모 사피엔스다.
그래서일까?
교양과 품위를 갖춘 인텔리들 사이에는
자기 종에 대한 혐오가 일종의 유행하는 덕목처럼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어야
제법 의식 있고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세상의 인텔리가 아니다.
그저 한낱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호모 사피엔스와 사람을 철저히 구분 짓는다.
세상에서 사람과 호모 사피엔스는 같은 뜻, 다른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사람은 일개 ‘생각하는 동물’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호모 사피엔스를 탄생시킨 진화론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창조론을 추종하는 까닭이다.
창조론을 따르는 사람은
‘무엇이 사람이냐(What is man)?’고 묻지 않는다.
‘누가 사람이냐(Who is man)?’라고 묻는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이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요, 신비요, 경이인 까닭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마땅히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본서 중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를 사람 존재(human being) 만으로
한정 짓는 것은 한쪽 발로 뜀뛰기를 하는 것과 같다.
양쪽 발로 자연스럽게 걷기 위해서는
사람됨(being human)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사람됨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부지기수다.
사람을 일반화시켜 다루고,
이용 대상으로 축소시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물처럼 사용하다 버리는 자들이 성공하는 곳이 세상이다.
이는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동물이나 정글과 다름이 없다.
요사이 부쩍 대두되고 있는 사이코 패스나 소시오 패스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이 되지 못하는
극단적 예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사람됨이란 대체 무엇일까?
먼저는 존귀함과 특별함이다.
숫자로 치환되는 통계학적 인간이 아니라
온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한 탐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특별함을 깨닫게 될 때,
남들과 같이 되려는 구속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사람은 끊임없이 흐르는 유동적 존재다.
언제까지나 지금의 나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순간순간의 선택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나로 변화해간다.
또한 사람은 과정의 질서뿐만 아니라
사건의 질서를 넘나들면서 다채롭게 살아간다.
자연은 탄생, 성장, 성숙,
그리고 죽음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역사는 특별한 드라마나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사건은 과정의 한 부분으로 축소될 수 없는 우연한 발생을 의미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과정과 사건들을 넘나들면서
시도하고 결정하고 도전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공존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기 때문에 사람인 것이다.
또한 사람은 받은 것에 답하여 되돌려 줌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된다.
이는 상호의존(감사)을 의미하는데,
주고받음의 의미를 아는 자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자신의 존재나
자기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 성스러워진다.
성스럽게 된 사람은 제 뜻대로 자신을 남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의 신성한 뜻대로 자신을 내어드린다.
그렇게 할 때, 사람은 가장 사람다워진다.
인간의 성스런 사명은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미에 연관시키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은 곧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존재의 궁극적인 가치성을 알아보기 위한 노력이다.
저절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더 큰 술어를 배워야 한다.
2차원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3차원의 관점과 술어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 존재보다 큰 술어는 삶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삶이란 하느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다.
결국, 인간 실존(삶)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신비,
그 감추어진 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법(내겐 성경 묵상과 기도)을 익힐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보다 큰 술어를 갖추게 될 것이다.
신비로운 하느님을 아는 방법은 두 가지다.
경이(wonder)와 두려움(awe).
경이와 두려움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가치 판단을 포함하고 있는 인식적 행위이자 방식이다.
이는 무엇이든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 자체를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애써 의도적으로 일상의 구태의연함을 낯설게 바라보고
생소함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행위.
일상에 속에 감춰진 신비를 발견하는 일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버릴 때 가능해진다.
무지한 자신을 인정하면서
태만한 자기 인식을 거듭 흔들어 깨울 때,
경이와 두려움은 비로소 능력으로 겸비될 테다.
존재는 복종이요 응답이다. “너는 존재하라”가 “나는 존재한다”를 선행한다. 나는 존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존재한다. -본서 중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게 된다.
그는 하느님과 동시대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술가가 자신의 비전을
구체적인 작품으로 생산해내듯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자기 삶으로 실현해 낸다.
사람은 자기 이상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결국 사람 이하가 되기 마련이다.
자기 이상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이상의 존재,
곧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자는
삶의 곤경들로부터 벗어나는 출구를 찾을 수 있다.
곤경의 출구란 자신의 곤경이 곤경을 위한 곤경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명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영성 생활의 비결은 찬양하는 능력에 있다. 찬양은 사랑의 추수다. 찬양이 신앙에 앞선다. 먼저 우리는 노래하고 그 뒤에 믿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신앙을 위한 준비를 갖추는 것, 즉 감수성과 찬양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의미 있게 사는 사람은
자신에게 기대되고 있는 요구에 부응한다.
자기 존재 자체가 은혜의 빚임을 알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물으면서
자기 의무, 책임, 충성, 희생을 기꺼이 다 한다.
그렇게 사람다운 사람의 참 모습은 감사하는 동시에,
순간의 장엄함과 존재의 경이로움과 신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거룩하게 될 가능성을 보면서
큰 소리로 찬양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삶의 냉혹하고 잔혹함 속에서도
놀람과 두려움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고
경배하면서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참 사람은 하느님이 부재하시듯 보이는 삶의 한복판에서
그분의 존재를 불러내는 자이다!
내게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예언자다.
그는 초월의 술어를 가진 사람이고,
이 책은 그가 파놓은 일종의 온천이다.
차가워진 영혼을 그의 뜨거운 언어 속에 담그자,
좀 살 것 같았다.
뜨거운 초월의 언어에 마음을 담근 채,
사람이 되라고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분의 뜻을 헤아려 보았다.
공간을 야망하고,
스스로를 소비자와 조작하는 자로 전락시키면서
내 영혼은 몸살이 났던 것 같다.
불편함과 불만족을 수용하는 것이
사람됨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마다하면서
허황되게 사건을 기대해왔던 것이다.
방심하면 짐승이 되고자 하는 야수성이
산처럼 일어나는 자가 나다.
그러므로 경계해야 한다.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시대인으로서,
사람이 되라고 부르신 소명을 따라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의 신성을 닮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오롯이 나를 나답게,
사람답게 만드는 길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Jun. 21.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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